수정 증보시에 제출된 참고 자료                             

<폐모관련 정청 전, 후 자료 요약>

 폐모 논의가 처음으로 거론 된 시점은 박응서(朴應犀) 역모사건 때 부터였으며, 그 후 흉서 사건으로 폐모론이 끈임 없이 일어났다.①
 이이첨(李爾瞻)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허균(許筠)을 꾀어서 격문을 만들고 흉서 사건을 만들어, 대비 폐하기를 계획하고, 삼사를 사주 하여 정권을 휘두르며 언로를 막아버려,② 진사 윤선도(尹善道)가 죽기를 각오하고 상소문을 올려 이이첨의 비리를 공개하고 탄핵 할 것을 진언 하였다.③
 이에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이 왕명에 의하여 의논을 거두어 들이라는 명령을 따라 언로의 중대함을 대략 아뢰었으나,④ 그러나 그 말 씀씀이가 또한 매우 애처로운데도 삼사가 헐뜯고 물리쳐서 조금도 너그럽게 용서하지 않으므로 병을 핑계 삼아,④-1 사의(2개월 동안 12번)로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였다.⑤
 그런 후 이이첨(李爾瞻) · 박승종(朴承宗) · 유희분(柳希奮)이 화합하기로 합의, 시를 써서 맹세하고 약속한 화합이, 세 집안이 끝내 서로 화합하지 못하여서⑥ 이이첨(李爾瞻)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폐모논의가 일자 한효순(韓孝純)은 이항복(李恒福). 기자헌(奇自獻) 등과함께 이를 피하려 하였다. 그는 폐모 문제를 피하기 위해 수차례 관직을 사직하려 하였으나, 받아들려 지지 않았다. 1618년 당시 우의정 이었던 그는 이이첨 등 폐모론 주동자들의 공포분위기에서 정승이라는 위치 때문에 어쩔 수없이 인목대비를(仁穆大妃)를 폐출, 유폐시키는 사건에 형식적 가담자로 휘말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⑦
 정청 후 흉서 사건에 관련하여 기준격(奇俊格)과 허균(許筠)을 조사할 것을 진언하였으나⑧ 받아주지 않자 삭직을 요구하였고,⑨ 폐출에 응하지 않고 계속 사의서만 제출하니 삼사에서 주벌을 가하고 삼사를 다스기를 청하자 “왕이 말하기를 고관대작으로서 서궁을 비호한 자가 효순 한 사람만이 아닌데, 그렇다면 일일이 죄를 주어야 하는가. 더구나 이미 체차시켰으니 그만 논하도록 하라.”⑩라는 왕명의 기록과 폐모반대를 분명히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쟁으로 인하여, 그의 행적에 대한 비판적 기사뿐 아니라 갖가지 편견들도 기록되어 있는 관련된 문집을 한효순(韓孝純) 자료집에 수록하여 놓았다.(韓範九)

 [자료참조]
 [朝鮮王朝實錄]

①광해 5년 4월 25일 왕이 친국, 광해 5년  5월 19일 폐모론  ②광해 5년 5월 22일. 입지강화 독자 폐모론, 광    해 9년 1월 20일. 허균을 꾀어 격문  ③광해 8년 12월 21일. 윤선도 상소문,  ④광해 9년 1월 4일 귀천군· 금    산군· 금계군 등 19인이 이이첨을 탄핵.  ⑤광해 9년 3월 23일 12번째 사직 상소 ⑥광해 9년 3월 9일 이이첨,     박승종, 유희빈 합의 시 ⑧광해 10년 1월 16일 기준격 ,허균 조사 할 것을 진언, ⑨광해 10년  1월 18일 삭직     요구  ⑩광해 10년 6월 4일 서궁 비호한 자 한효순 뿐만 아니다.    

[續雜錄]
 ④-1속잡록 1 정사년 만력 45년, 광해군 10년(1617년),      

[네이트 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⑦수정 증보판 한효순 항목

<신원회복 되는 과정>

○ 영조 112권, 45년(1769 기축 / 청 건륭(乾隆) 34년) 2월 29일(임오) 1번째기사
   한효순의 후손인 한종찬에 대해 구애됨 없이 조용할 것을 명하다

[임금이 영의정 홍봉한(洪鳳漢)과 봉조하(奉朝賀) 홍계희(洪啓禧)를 소견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계축년17356) 에 폐모(廢母)를 정청(庭請)하였을 때 한효순(韓孝純)이 수상(首相)으로서 비록 논계(論啓)에 참여하였으나, 연로하여 황겁(惶怯)한 소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후 그 후손 한종찬(韓宗纘)은 등제(登第)하여 대망(臺望)에 지색(枳塞)당하고 있으니, 이는 조정에서 한계(限界)를 지키고 울체(鬱滯)함을 소통(疏通)하는 도리에 있어서 득실(得失)이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청컨대 하순(下詢)하여 처리하소서.” 하자,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순문(詢問)하였는데, 모두 대답하기를, “한종찬은 한효순에 대해 5, 6대가 됩니다.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유택(遺澤)이 5세가 되면 끊어지는 것이니, 재주에 따라 소통시키는 것이 성세(聖世)에서 사람을 임용하는 도리에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한종찬은 구애됨이 없이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 정조 15권, 7년(1783 계묘 / 청 건륭(乾隆) 48년) 1월 7일(기해) 4번째기사
   이조 참판 정창순을 체차하다

[이조 참판 정창순(鄭昌順)을 체차하였다. 정창순이 한종찬(韓宗纘)을 봉상시 정에다 의망하였는데, 한종찬은 한효순(韓孝純)의 후손이었다. 우의정 김익(金熤)이 ‘한효순은 명분과 의리를 어기었으므로 그의 후손을 의망해서는 아니 된다.’며 공석에서 논하고 배척하자, 정창순이 상소를 올려 의리를 들어 사직하였는데, 임금이 그의 직책을 체차한 것이다. 이윽고 한효순의 후손 한석민(韓錫敏)이 쟁(錚)을 치며 억울하다고 호소하자, 임금이 선조(先朝) 기축년3334) 에 한효순을 용서하는 분부를 보고 특별히 한종찬을 구애 없이 등용하라고 명하였다.]

○ 고종 1권, 1년(1864 갑자 / 청 동치(同治) 3년) 7월 11일(기유) 4번째기사
   죄인 중 벼슬을 회복시켜 줄 사람의 명단을 명하다

[전교하기를, “한효순(韓孝純), 홍계희(洪啓禧), 김양택(金陽澤), 김종수(金鍾秀), 김종후(金鍾厚), 심환지(沈煥之), 김달순(金達淳), 김한록(金漢祿), 정일환(鄭日煥), 김관주(金觀柱)는 모두 관작을 회복시켜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박엽(朴燁), 유효립(柳孝立), 오정창(吳挺昌), 홍양해(洪量海), 이동형(李東馨), 신의학(愼宜學) 등은 모두 죄명을 말소하고 그 관작을 회복시켜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전 좌의정(前左議政) 목내선(睦來善), 전 참판(前參判) 이봉징(李鳳徵), 전 좌통례(前左通禮) 서유기(徐有沂)·한후락(韓後樂) 등을 모두 탕척(蕩滌)하라.” 하였다. 특별 하교로 송환정(宋煥程), 김일주(金日柱) 등 102명을 모두 죄인에서 말소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안정 부정(安貞副正) 이균(李畇), 양평 수(楊平守) 이득경(李得慶), 창산군(昌山君) 이상(李相), 낙신 수(樂新守) 이인환(李人煥), 덕신 수(德新守) 이인혁(李人赫), 밀평군(密平君) 이집(李㙫), 밀운군(密雲君) 이훈(李壎), 여천 수(驪川守) 이경(李坰), 반양 도정(潘陽都正) 이소(李炤), 일신 도정(一新都正) 이인엽(李人燁), 호산군(壺山君) 이성(李檉), 밀풍군(密豐君) 이탄(李坦),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 여흥군(驪興君) 이해(李垓), 여릉군(驪陵君) 이기(李圻),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과 이하전(李夏銓)은 모두 관작을 회복시켜라.” 하였다.]

○ 고종 10권, 10년(1873 계유 / 청 동치(同治) 12년) 11월 3일(무신) 2번째기사
   호조 참판 최익현이 다시 상소문을 올려 만동묘와 서원의 복구 등을 청하다  
○ 고종 10권, 10년(1873 계유 / 청 동치(同治) 12년) 11월 3일(무신) 3번째기사
   최익현의 상소문에 따라 효순, 현일 등이 반역행위를 했기에 그 벼슬을 빼앗게 하다  
○ 순종 2권, 1년(1908 무신 / 대한 융희(隆熙) 2년) 1월 30일(양력) 4번째기사
   한효순, 정인홍 등에게 죄명을 벗겨주고 작위와 시호를 회복시켜 주다  
○ 순종 2권, 1년(1908 무신 / 대한 융희(隆熙) 2년) 4월 30일(양력) 3번째기사
   죽은 좌의정 한효순 외 77명의 관작을 회복시켜 줄 것에 관하여 보고하다  

<정청이전 자료>

○ 광해 122권, 9년(1617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12월 11일(임인) 9번째기사
   기자헌은 귀양 보내고 이항복은 고향으로 보내게 하다  
○ 광해 122권, 9년(1617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12월 17일(무신) 3번째기사
   기자헌은 정평에, 이항복은 용강에 귀양 보내다  
○ 광해 121권, 9년(1617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11월 26일(정해) 2번째기사
   폐비 문제를 피하려는 기자헌 한효순 등을 탄핵하는 유학 이강의 상소  
○ 광해 122권, 9년(1617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12월 3일(갑오) 12번째기사
   기자헌·한효순 외에 김효성·정택뢰 등의 처벌을 청하는 유학 황정필의 상소  
○ 광해 65권, 5년(1613 계축 / 명 만력(萬曆) 41년) 4월 25일(계축) 7번째기사
   서청에 나아가 박응서를 먼저 친국하다  

[왕이 서청(西廳)에 나아가 친국하였는데,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 판의금 박승종(朴承宗), 지의금 유공량(柳公亮)·민형남(閔馨男), 동지의금 조존세(趙存世), 대사헌 최유원(崔有源), 대사간 이지완(李志完), 형방 승지 권진(權縉), 문사 낭청 오정(吳靖)·조희일(趙希逸)이 추관(推官)으로 입시하고, 도승지 정엽(鄭曄), 좌승지 이덕형(李德泂), 우승지 이신원(李信元), 좌부승지 목장흠(睦長欽), 동부승지 윤중삼(尹重三), 주서 이용진(李用晉), 가주서 안홍량(安弘量), 대교 엄성(嚴惺), 검열 정백창(鄭百昌)이 시신(侍臣)으로 입시하였다. 먼저 박응서(朴應犀)를 국문하였는데, 응서가 공초하기를, “서양갑(徐羊甲)과 박치의(朴致毅)가 주모자로서 정협(鄭浹)·박종인(朴宗仁)·심우영(沈友英)·허홍인(許弘仁)·유인발(柳仁發) 등과 함께 호걸들과 결탁한 뒤 사직을 도모하려 한 지 거의 4, 5년이 지났는데 그 동안 틈을 얻지 못했습니다.

선왕께서 승하하신 뒤 중국 조정에서 조사(詔使)가 나오자 허홍인과 서양갑이 활을 들고 남별궁(南別宮) 문 밖에 가서 조사를 쏘아 맞추고 그 때를 이용해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조사의 호위가 엄밀하였기 때문에 그 계책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지난해에는 이경준(李耕俊)이 흥의 군문(興義軍門)의 명호(名號)로 격문을 작성하고 사대문(四大門)에 붙여 민심을 동요케 한 뒤 곧바로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마침 김직재(金直哉)의 변고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경준이 도로 격문을 빼앗아 불태워버리고 계책을 뒤로 미루었습니다. 7년 전에 서양갑이 맨 먼저 역모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심우영·허홍인·유효선(柳孝先) 등과 함께 여주(驪州) 강변의 넓은 들판에 같이 살며 의식(衣食)을 함께 하였는데, 어느 날 흉모를 이야기하기를 ‘우리들이 뛰어난 재질을 갖고 있는데도 오늘날의 법 제도 때문에 출세길이 막혀 뜻을 펴지 못하고 있다. 사나이가 죽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죽는다면 큰 이름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 뒤로 김평손(金平孫)·김비(金斐)와 결탁하는 한편 또 무사들과 관계를 맺으려 하였으나 금은이 없는 것을 한스러워하였습니다.

신해년 가을에 서양갑이 직접 소금 장사를 하며 해주(海州)에 눌러 있은 지 반년 만에 사람을 죽이고 도망쳐 왔습니다. 지난 해 봄에 정협·허홍인·박종인·김비가 왕사(王使)라고 거짓 칭하고 부자인 이의숭(李義崇)의 집을 털어 금은을 도적질했으나 또 금액이 적어 한한 나머지 지난 해 가을과 겨울 사이에 허홍인·유인발·김비·김평손과 함께 세 차례나 경상도에 가서 왕래하는 은상(銀商)을 때려 죽여 수천 금을 얻은 다음 토호(土豪)와 결탁하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금년 봄 정월에 서양갑이 박치의·허홍인 등과 함께 은상을 때려죽이고 은 6, 7백 냥을 얻었습니다.

지금까지 예정되어 있는 계획은 3백여 인을 동원해서 대궐을 밤중에 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와 친한 무사로 하여금 조정의 집정자(執政者)에게 뇌물을 써서 선전관(宣傳官)이나 내금위(內禁衛)·수문장 등의 관직을 얻어 내응(內應)할 발판을 마련하는 동시에 또 금은을 집정자에게 뇌물로 주어 정협을 훈련대장으로 임명하고 금과 비단을 모두 뿌려 3백여 인과 결탁한 다음 야음을 이용해 대궐을 습격하려 하였습니다. 이때 제일 먼저 대전(大殿)을 범하고 두 번째로 동궁(東宮)을 범한 다음 급히 국보(國寶)를 가지고 대비 전(大妃殿)에 나아가 수렴청정을 하도록 청하는 한편 성문을 굳게 닫고 백관을 모두 바꿔치려 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먼저 척리(戚里) 및 총병·숙위하는 관원을 죽이고 친구와 같은 패거리들로 조정을 채우는 동시에 서양갑 자신은 영의정이 되고 나머지는 순서대로 관직을 임명받을 계획이었습니다. 또 유배 중인 무리들을 석방하여 현관(顯官)에 임명함으로써 동심협력해 대군(大君)을 옹립케 하고 팔도의 감사와 병사도 모두 같은 패거리로 채운 다음 사신을 보내 중국 조정에 주문(奏文)하려 하였는데 그 내용 중에는 차마 듣지 못할 점이 있었습니다. 이상이 예정된 계획이었는데 아직 대대적으로 모으지를 못했기 때문에 시일은 정하지 못했고 또 대비와 대군에게도 알리지 못했습니다. 3년 전에 심우영이 춘천(春川) 골짜기 안에 양곡을 비축해 두고 장래 군량으로 쓰려 하였습니다. 금년 봄에는 서양갑이 경상도에 가서 무사 권인룡(權仁龍)과 관계를 맺었는데, 인룡은 그야말로 일국(一國)의 장사로서 달리는 말을 뛰어서 따라잡는 자였습니다.

이 적들의 흉모는 이미 정해졌지만 아직 병마(兵馬)를 모으지 못했기 때문에 군안(軍案)은 없는 상태입니다. 서양갑·심우영·허홍인·박치의·박종인·김평손·김경손(金慶孫)·이경준·정협·김비·유인발·서인갑(徐寅甲)·유효선(柳孝先)은 뜻을 같이 해 의논이 이미 정해진 자들입니다.” 하였다.]

○ 광해 66권, 5년(1613 계축 / 명 만력(萬曆) 41년) 5월 19일(병자) 6번째기사
   헌납 유활·정언 박홍도가 역적 처벌을 엄히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혐하다

[헌납 유활(柳活), 정언 박홍도(朴弘道)가 아뢰기를, “신들이 모두 용렬한 자로서 외람되게 언관의 자리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전에 없던 국가의 변고를 만났으니 임금이 모욕을 당하는 이런 날 마땅히 죽을 각오로 일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적을 토죄(討罪)하는 일을 엄히 하지 못한 결과 역적 이의가 아직도 천지간에 용납되게 하고 또 김제남에게 왕형(王刑)을 시행하는 일을 여태 지체되도록 •˜였으니 신들의 죄를 면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어제 삼가 보건대 정사호(鄭賜湖)를 추고하라고 비답 하셨습니다. 역옥을 다스리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그 사이에 관련되어 있는 자를 추고만 하라고 명하신단 말입니까. 이 또한 너무 소홀한 조처가 아니겠습니까. 제남이 역모를 꾸미리라고는 사람들이 생각하기 어려웠을 테니 그 당시 잔치에 참석했었는지를 따질 필요는 물론 없다고 하겠습니다만, 사호로 말하면 방면(方面)의 중임을 맡은 신분으로서 그 이름이 이미 역적의 입에서 나왔는데, 어떻게 감히 태연하게 재직하면서 번신(藩臣)의 반열에 끼이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번의 추고 공사가 어느 관아로 내려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가령 국청에 내려질 경우에는 자연히 나문(拿問)하는 예가 적용되겠으나 만약 헌부에 내려진다면 역적의 입에서 이름이 나온 자에 대해 헌부가 어떻게 감히 승전(承傳)을 받들어 공함(公緘)을 띄워서 물어본단 말입니까. 신들이 지난번 황신(黃愼)을 논할 때에 파직시키라는 성상의 비답을 보고는 곧바로 정계했기 때문에 또 이런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 황신이 역적 박종인(朴宗仁)과 평소 절친하게 지내면서 은(銀) 등의 장물을 자기 집에 놔두도록 했고 보면 그 죄야말로 징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황신 같은 사람도 아니고 황신 같은 직책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사람이 역적의 장물을 자기 집에 놔두도록 했다면 전하께서는 그냥 놔두고 묻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니면 파직하고 추고만 하는 정도로 그치시겠습니까. 만약 그가 억울하다고 인정된다면 혹 이와 같이 해도 안 될 것은 없겠습니다만, 역옥을 다스리는 체면으로 볼 때에는 진정 이와 같이 완만하고 소홀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밖에 여러 차례나 역적의 입에서 이름이 거론된 자로서 가령 서성 같은 자의 경우는 본래 그를 다스릴 만한 상당(相當)한 율(律)이 있는데도 역시 석방시켜 시골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그에게 적용할 타당한 율이겠습니까. 그리고 나아가 역당 권순성(權純性)의 경우는 서양갑(徐羊甲) 등과 흉악한 역적모의를 함께 했던 정상이 낱낱이 역적들의 공초에 분명히 나왔는데도 국청의 추관(推官)이 먼저 국문하도록 청하지 않은 결과 그지없이 흉악한 적으로 하여금 유혼(遊魂)에 숨이 붙어 있게끔 한 지가 지금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역적의 공초 가운데에 ‘궁금(宮禁)에 관한 일은 순성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한 내용이 있고 보면 이 자야말로 겨드랑이 속에서 쏘아대는 독벌이요 소매 속에 들어 있는 사갈(蛇蝎)이라 할 것입니다. 전하의 궁액(宮掖)에 관한 일을 몰래 역적에게 통보했다고 한다면 순성이 전하를 위하는 마음을 가진 자이겠습니까. 성상의 조정에 있으면 관상감의 일개 교수(敎授)밖에 되지 못하는 반면 흉악한 역적에게 붙을 경우에는 공경(公卿)이나 장상(將相)쯤 자연히 굴러 들어오리라고 기대했을 것인데 그런 그의 마음의 소재를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서양갑이 저자에서 죽임을 당한 뒤로 여태 한 번도 국문하지 않았으므로 인심이 한결같이 통분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역적의 국문과 관련된 사항에 대해서는 추관(推官)이 알아서 일일이 계청을 하고 경중을 참작해 조정하면서 각각 체례(體例)에 맞도록 해야 할 것인데, 이를 염두에 두지 않고 심상한 일처럼 간주한 채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모두 성상께서 재결해 주시기만을 바라고 있으니, 오늘날 역적을 토죄하는 일이 엄하게 행해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친국하시는 날 귀찮게 해드리는 것이 미안하다는 것은 물론 알고 있습니다만 언책(言責)을 맡고 있는 몸으로서 그냥 자리만 지키고 있을 수는 결코 없는 일입니다. 신들의 직을 파척하도록 명하시어 역적을 토죄하는 의리를 엄히 하도록 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두 사람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이 때 최유원 등이 이의를 죽이라고 요구하는 논을 강력히 주장하여 토역(討逆)하는 일이 날이 갈수록 삼엄해졌었다. 그런데 유활과 박홍도가 이이첨의 패거리로서 그 험준한 논을 펼칠 길이 없게 되자 매사에 한 단계 더 각박하게 논하곤 하였는데, 그 결과 마침내는 폐모론(廢母論)까지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 ]

○ 광해 66권, 5년(1613 계축 / 명 만력(萬曆) 41년) 5월 22일(기묘) 18번째기사
   영창 대군과 모후의 일, 어몽렴의 폐단 등에 대한 진사 이위경 등의 상소문

[ 진사 이위경(李偉卿)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살피건대 신들이 역적을 토죄하는 일로 이달 19일 태학에서 집회를 가졌는데, 다사(多士)가 공동으로 의논하여 이위경을 소두(疏頭)로 삼고 이상항(李尙恒)·이분(李衯)을 소색장(疎色掌)으로 삼았으며, 장의(掌議)는 신경(辛暻)·성하연(成夏衍)이 일찍이 이 직임을 맡았었기 때문에 그대로 소 올리는 일을 맡아보게 하였습니다.

소에 대한 의논을 이미 정했을 때 생원 채겸길(蔡謙吉)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지난 무신년에 이신(李莘)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감히 성균관에서 집회를 가졌을 때 군상을 지목하며 크게 부도(不道)한 발언을 했었는데 역적 이경준(李耕俊)의 격문 가운데 나오는 한 조목은 실로 이를 말미암아 구실로 삼게 된 것이었다. 이렇듯 역적을 도와 준 무리는 오늘날 먼저 제거해 버리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런 뒤에야 역적을 토죄하는 큰 의리를 그런 대로 거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중의 의논도 모두 동일하였으므로 즉시 삭적(削籍)시켰는데 중론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습니다.

신들이 이어 소청(疏廳)에서 치재(致齋)하고 소초(疏草) 하나를 만들었는데, 그 대략에 ‘역모를 꾀하는 것은 천하의 대죄(大罪)요 역적을 토죄하는 것은 천하의 대법(大法)입니다. 이런 죄가 있는데도 그 법을 쓰지 않는다면 군신의 대의가 이로부터 없어지고 천지의 떳떳한 법이 어지러워지게 될 것입니다. 신들이 삼가 살피건대 김제남이 이의(李㼁)를 빙자하여 역모를 꾀한 일이야말로 옛날에 있지 않았던 변고인데 다행히도 조종께서 말없이 도와주신 덕분에 적도가 자수하여 흉역을 꾸민 정상이 남김없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이제 대법으로 대죄를 다스려야 마땅한데 상형(常刑)을 거행하지 않고 있으므로 인심이 더욱 답답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흉악한 역적들의 숨이 오래도록 붙어 있게 해주고 아직도 그 요망한 육신에 주륙(誅戮)을 가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어쩌면 성상께서 인애(仁愛)하시는 면은 넉넉하게 가지고 계시는 반면 무위(武威)의 측면에서는 혹 부족한 점이 있으셔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대신과 삼사가 대궐에 엎드려 토죄하기를 청하고 있지만 그 성의에 또한 미쁘지 못한 점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삿된 논의가 빌미가 되어 의리가 밝혀지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역적을 토죄하는 일이 타당성을 잃고 옥사(獄事)를 엄히 다스리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까.

역적 의가 비록 어린 아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흉도의 귀중한 이용물이 된 나머지 그를 왕으로 옹립하기로 했다는 설이 적도의 공초에 낭자하게 나왔으니 이런 대역(大逆)의 이름을 몸에 지니게 된 이상 천지 사이에 용납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지친(至親)이라는 연고와 우애하는 정 때문에 시일을 끌기만 한 채 차마 법을 적용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른바 법이라는 것은 천하의 공(公)에 속한 것이요 정이라는 것은 일 개인의 사(私)에 속한 것이니, 전하께서 어떻게 일 개인의 사 때문에 만세의 공을 없앨 수가 있겠습니까. 옛날 성인들의 예를 찾아보더라도 주공(周公)은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죽였고 우리 태종(太宗)은 방석(芳碩)을 죽였는데, 모두 천하와 종묘 사직을 위해 계책하면서 의심하지 않고 실행에 옮겼던 것은 사적인 은혜를 가볍게 보고 대의를 중히 여기면서 변고를 당해 제대로 권도(權道)를 발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송(宋)나라의 장준(張浚)이 의거를 일으켜 반정(反正)하고는 황자(皇子) 부(旉)가 일찍이 묘유(苗劉)674) 에게 옹립되었다는 이유로 제거하기를 건의한 결과 마침내 철탑(鐵塔)의 죽음이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철탑의 설은 바로 패사(稗史)의 무설(誣說)로서 나대경(羅大經)이 이미 밝혀놓았다. 당시 재상 윤효전(尹孝全)이 임금의 뜻에 아부할 목적으로 이 설을 끄집어내어 의를 죽일 공안(公案)으로 삼았는데 위경 등이 부화뇌동한 것이었다. 】 부는 당시 임금의 아들로서 뒷날 장성하면 저군(儲君)이 될 몸이었는데 나이도 겨우 3세밖에 안 되었고 보면 역시 아는 것이 없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처럼 급하게 제거했던 것은 그야말로 대의는 밝히지 않을 수가 없고 왕법은 엄히 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의는 전하에게 있어 동기(同氣)라는 친함이 있다 하더라도 의리를 보면 군신 관계에 있으니 신하로서 적에게 추대된 이상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위로 종묘사직의 막중함을 생각하시고 아래로 아랫사람들의 심정을 살피시어 속히 유사에게 역적 의를 처단하고 김제남을 엄히 국문하라고 명하소서. 그리하여 나라의 신민들로 하여금 왕법이 지극히 엄하다는 것을 알게 하고 군신의 대의를 밝히게 한다면 종묘사직에 있어 그런 다행이 없겠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20일 낮에 진사 어몽렴(魚夢濂)이 재방(齋房)에 돌입하여 장의(掌議) 성하연을 대놓고 배척하기를 ‘너야말로 서인 집안의 자제인데 어떻게 역적을 토죄하는 일을 할 수 있단 말이냐.’ 하였는데, 신들이 끝내 동요되지 않자 몽렴이 스스로 물러갔습니다. 그런데 진사 성신구(成信耉)도 첫날에 집강(執綱)을 헐뜯고 갔었습니다. 21일은 소장을 올리기로 예정된 날이었으므로 다사(多士) 수백 인이 이야기를 듣고 모였는데 소장을 모두 쓴 다음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장차 소를 받들어 나가려 할 즈음에 몽렴이 또 생원 경유후(慶有後)와 진사 정복형(鄭復亨) 등을 이끌고 곧장 소장을 올려놓은 탁자 아래로 와서 마주 대하고 힐문하기를 ‘성하연이 장의를 맡다니 어찌하여 나가지 않고 아직도 소 올리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가.’ 하였습니다. 그리고 진사 박자응(朴自凝)이 또 말하기를 ‘성하연의 아비 이름이 대유지방(大有志榜)에 들어 있고 보면 이미 역적의 패거리라 할 것인데 어떻게 이런 자와 함께 소장을 올릴 수 있겠는가.’ 하기에, 신들이 대답하기를 ‘익명서(匿名書)는 아비와 자식 간에도 서로 전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더구나 다사가 모인 곳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김제남을 피해 집을 팔고 이사까지 했으므로 사람들이 그 선견지명에 탄복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이에 성하연이 말을 듣고 피해서 나갔는데, 어몽렴 등이 또 신경과 이분 등을 배척하여 자리에 있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경유후가 또 위경을 매도하며 말하기를 ‘너 역시 조희일(趙希逸)의 사촌인데 네가 소두가 되어 역적을 토죄할 수 있느냐.’ 하고, 박자응도 말하기를 ‘네가 정인홍(鄭仁弘)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으니 사림의 정론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어떻게 감히 이런 무리와 함께 소를 올리려 하는가.’ 하기에, 위경 역시 피해 나가려고 하다가 소를 올리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고 이상항과 함께 소를 올려놓은 탁자 앞으로 가서 북쪽을 향해 절하고 나가니, 그곳에 가득 모였던 다사가 서로 돌아보고 얼굴빛을 변하며 일시에 모두 흩어졌습니다. 그러자 어몽렴이 그 패거리를 이끌고 명륜당(明倫堂)에 올라가서 스스로 소두(疏頭)가 된 뒤 그 소를 고쳐 들임으로써 장내를 소란스럽게 하여 일을 망친 죄를 면해 보려 하였습니다. 아, 소장을 올리는 일이야말로 한나라 다사의 의로운 행동인데 거꾸로 유자(儒者)의 이름을 가진 자에게 저지되었으니 이는 옛날에 있지 않았던 변고입니다.

저 어몽렴이라는 자는 아비도 안중에 없는 자입니다.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아는 법인데 나이가 10여 세나 되었는데도 어미를 따라 아비를 버렸고 보면 윤기(倫紀)에 죄를 지은 자라 할 것입니다. 본디 황유첨(黃有詹)의 사촌 동생으로서 신요(申橈)의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고 또 성준구(成俊耉)와 동서가 되었으니 그가 역적을 토죄하는 도리를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감히 사람들을 향해 거만하게 행동할 수 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소두가 되어 다사를 이끌 수 있단 말입니까. 신구는 바로 준구의 동생으로서 유영경(柳永慶)의 여얼(餘孽)인데 그가 어떻게 감히 사류(士類)의 틈에 끼어서 사론(士論)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박자응이나 경유후 같은 자들이 거꾸로 이런 부류와 함께 역적을 토죄하는 일에 훼방을 놓았으니 그 마음속에 의도하는 바를 더욱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는 대개 유영경의 남은 패거리들이 이 소(疏)에서 영경을 화란의 우두머리로 할까 겁을 내고, 전은(全恩)을 주장한 집안의 자제들이 이 소에서 전은을 청했던 것을 죄목으로 삼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서로 이끌고 와서는 을러대며 앞으로 나와 한사코 혈전을 벌이며 꼭 저지시킨 뒤에야 그만두려 한 것인데, 이것도 알고 보면 의리가 어두워지고 공의(公議)가 없어진 탓으로 영경과 똑같은 수법을 구사하며 전은을 청했던 것을 옹호하려 한 데 불과하다 할 것입니다.

아, 모후(母后)가 안으로는 무고(巫蠱)하는 짓을 저지르고 밖으로는 역모에 응하였으니 어미의 도리가 이미 끊어졌고, 왕자가 적에게 추대되는 등 그 흉모가 여지없이 드러났으니 동기의 정도 자연히 끊어진 것입니다. 전하께서 모자(母子)와 형제 사이에서 변고를 당했으니 그야말로 온 나라 신민들이 의기를 떨치고 일어나 토죄하기를 청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선비된 자가 경사(京師)에 있으면서 목욕하고 토벌하는 일675) 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인께서 《춘추(春秋)》에서 으레 손(孫)이라고 쓰셨고676) , 호씨(胡氏)는 《강목(綱目)》에서 장간지(張柬之) 등을 죄주었으니677) , 그 의리가 지극히 엄하고 절실하다 하겠습니다. 신들이 군부(君父)를 위해 역적을 토죄하려다가 거꾸로 이 자들이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이미 봉해 두었던 소를 공안(空案)으로 두고 물러 나왔는데 생각이 있어도 진달드리지 못하고 무력하게 척사(斥邪)하지도 못한 채 감히 다사(多士)의 뜻을 가지고 때우고 기운 소를 다시 올리면서 형벌이 내려지기만을 기다릴 따름입니다.”

하니【이 소에 참여한 자는 생원 이상항·최호(崔濩)·채겸길(蔡謙吉)·신게(申垍)·한희(韓暿)·이일형(李日馨)·우필순(禹弼舜)·이연(李衍)·남성신(南省身)·민심(閔)·서국정(徐國楨)·이생인(李生寅)·성하연과 유학 황덕부(黃德符)·안응노(安應魯)·심지청(沈之淸)·한급(韓昅)·한오(韓晤)·윤신(尹莘)·우필해(禹弼該) 등이었다. 상항은 이첨(爾瞻)의 사위요 창후(昌後)의 아들이며, 희·오·급은 찬남(纘男)의 아들이며, 최호는 정조(鄭造)의 사위이며,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이첨의 족속들인데, 이첨 자신이 소의 내용을 만들어 주었다. 전후에 걸친 유소(儒疏)는 모두 이첨이 붓으로 정해준 것인데 더러는 같은 패거리인 허균(許筠)과 김개(金闓)로 하여금 짓도록 하기도 하였다. 】 답하기를, “소의 사연은 잘 았았다. 내가 불행하여 또 이런 변을 만났는데 공의(公議)가 아무리 지엄하다 하더라도 개인적인 정리상 차마 못할 점이 있다.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고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이때 영창(永昌)을 법대로 처단하라고 청하는 의논은 유희분(柳希奮)과 박승종(朴承宗) 등이 또한 주도하였는데, 대신 이하도 같이 휩쓸려 감히 이론을 제기하지 못했으며, 태학생 가운데 아는 것이 있는 자들은 이 논을 감당하고 싶지 않아 많이들 피해 물러갔었다. 이위경 등은 본래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의 심복으로서 제자로 불리웠는데, 그들이 태학에 들어가 선비를 모은 뒤 소를 갖추어 올리려 하자 유희분과 박승종의 집안에서 이위경 등이 이를 계기로 성균관 유생들의 공론을 주도하여 자기 패거리를 공격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마침내 어몽렴 등으로 하여금 이들을 쫓아내게 한 뒤 스스로 소를 만들어 영창 및 김제남을 죄주도록 청했던 것이었다. 이에 이위경이 또 자기네의 소가 몽렴이 논한 것보다 나을 것이 없음을 알고는 마침내 모후(母后)를 폐위시키자는 논을 내어 압도하려 한 것인데, 이로부터 삼창(三昌)의 당(黨)이 걸핏하면 서로들 배척하며 갈등을 빚곤 하였다. 그러나 이첨이 독자적으로 폐모론(廢母論)을 가지고 우세를 확립하면서 유희분과 박승종의 무리가 상대적으로 세력을 잃게 되자 꽤나 사론(士論)에 빌붙으면서 자신을 합리화시켰는데 사류(士類) 중에서도 그들을 중하게 의지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대체로 볼 때 국가가 붕당으로 인해 혼란스럽게 된 화가 이 때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 】]

○ 광해 85권, 6년(1614 갑인 / 명 만력(萬曆) 42년) 12월 25일(계묘) 1번째기사
   저주·흉서의 일에 대한 교서를 짓도록 전교하다  
○ 광해 87권, 7년(1615 을묘 / 명 만력(萬曆) 43년) 2월 18일(을미) 8번째기사
   저주·흉서에 대한 일로 교서를 내리다  
○ 광해 103권, 8년(1616 병진 / 명 만력(萬曆) 44년) 5월 7일(병자) 1번째기사
   황해 감사 윤조원이 장계를 올렸는데, 해주 옥사가 비롯되다  
○ 광해 111권, 9년(1617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1월 20일(병술) 11번째기사
   기자헌·박승종이 흉서로 인해 동요하지 말고 의논하도록 하다  

[영의정 기자헌, 판의금부사 박승종이 의논드리기를, “이번의 이 흉서는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지혜로운 자가 아니더라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말을 얽어서 성상께 욕을 끼침에 있어서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니, 그 사악하고 화를 즐기며 나라에 일을 만들어 낸 정상이 갖가지여서 가리 우기가 어렵습니다. 글은 비록 교묘하지만 더더욱 그 속마음을 볼 수 있는바, 그 이름을 감춘 자를 잡아내어서 만 토막으로 저미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그러니 어찌 이로 인하여 추호라도 놀라 동요하는 일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신들은 이 외에는 다시 더 진달드릴 바가 없습니다.

가령 큰 변고가 있을 경우, 유(柳)·박(朴)·기(奇)에게 무슨 조그만 치라도 의지할 것이 있어서, 반드시 협박하고 몰아치고 강제한단 말입니까. 이것은 세 신하를 제거하려는 계책에 불과합니다. 그의 사악하고 형편없음을 여기에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미 내몰리고 강제될 대상으로 역서(逆書)에 이름이 쓰여 졌으니, 신하로서의 악이 이에 이르러서는 더 더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어떻게 천지 사이에 얼굴을 들 수가 있겠습니까.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면서 물러가지 않았으니 죽이려고 드는 것이 이처럼 극도에 이른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니 허겁지겁 달려가 깊은 산골짜기로 몸을 숨기는 것이 마땅한데, 어찌 감히 태연스레 행공(行公)하면서 보통 사람과 같이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대개 화살에 매어 투서(投書)하는 것은 익명서인 것으로, 오늘 양사 장관이 한 논의가 참으로 적당합니다. 신들의 뜻도 역시 그러하니, 내일 다른 대신을 명초하여 다시 의논해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이 때 이이첨이 윤선도 등에게 배척을 받았는데, 왕이 비록 윤선도 등을 죄주기는 하였으나, 역시 그들의 말에 의심이 없을 수 없었다. 이에 이이첨이 그것을 걱정하여 주상의 뜻을 받들어 대비(大妃)를 폐하기를 청하여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다만 전에 폐론(廢論)을 굳게 숨기고 여러 차례 큰 옥사를 일으키어 대신을 내쫓기까지 하면서, 모두 ‘대비를 폐위시키자는 설을 얽어내어 임금을 무함하고 사림을 모해하였다.’는 것으로 죄목(罪目)을 삼았은즉, 스스로 이 논의를 다시 일으키는 것은 합당치 않았다. 이에 몰래 허균을 꾀어서 이 격문을 만들게 해, 마치 큰 역적이 장차 일어나고 대비가 거기에 호응하려는 것처럼 꾸며서 다시 논의를 일으킬 계획을 하였다. 이것이 거짓 격문을 던져 넣은 본뜻이다. 〈얼마 뒤에 허균이 한 일이 크게 드러나자 유가(柳家)·박가(朴家)가 또 이를 좌지우지하게 되었고 이이첨이 또 속으로 두려워하였다. 이에 과원(果園)의 모임을 주선해 유씨와 박씨의 공격을 늦추었으며, 왕이 또 몰래 허균을 부추겨서 속히 폐론을 내어 자신의 죄를 씻게 하였다. 이에 과원의 모임이 파하고 폐모론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

○ 광해 111권, 9년(1617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1월 26일(임진) 5번째기사
   서국정이 영상 기자헌의 체직을 청하는 말을 상께 아뢰다  
○ 광해 110권, 8년(1616 병진 / 명 만력(萬曆) 44년) 12월 21일(정사) 2번째기사
   진사 윤선도의 상소문

[진사(進士) 윤선도(尹善道)가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들은 바에 의하면, 임금이 아랫사람들을 통제하는 방도로는 권강(權綱)을 모두 쥐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경(書經)》에도 이르기를 ‘오직 임금만이 상도 줄 수가 있고 벌도 줄 수가 있다.’고 하였으며, 송(宋)나라의 진덕수(眞德秀)도 말하기를 ‘임금 된 자가 어찌 하루라도 권위의 칼자루를 놓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뜻 깊은 말입니다. 신하된 자가 참으로 나라의 권세를 오로지 쥐게 되면 자기의 복심(腹心)을 요직에 포열(布列)시켜 상과 벌[威福]을 자기에게서 나오게 합니다. 설령 어진 자가 이렇게 해도 안 될 일인데, 만약 어질지 못한 자가 이와 같이 한다면 나라가 또한 위태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훌륭하신 상께서 위에 계시어 임금과 신하가 각기 자신의 직분을 다하고 있으니 이러한 자가 없어야 마땅하겠습니다만, 신이 삼가 예조 판서 이이첨(李爾瞻)의 하는 짓을 보니 불행히도 이에 가까우므로 신은 삼가 괴이하게 생각합니다.

신은 하찮은 일개 유자(儒者)로서 어리석고 천박하여, 비록 도성 안에 살지만 외방에 사는 몽매한 백성과 다를 바가 없으니, 조정의 일에 대해서는 백 가지 가운데 한 가지도 알지를 못하지만, 단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가지고 성상께 우러러 진달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유념해 주소서.

신이 삼가 보건대, 근래의 고굉(股肱)·이목(耳目)·후설(喉舌)을 맡은 관원들과 논사(論思)·풍헌(風憲)·전선(銓選)을 담당하고 있는 관원들은 이이첨의 복심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 간혹 그들의 무리가 아니면서 한두 사람 그 사이에 섞여 있는 자들은, 반드시 그 사람됨이 무르고 행실이 줏대가 없으며 시세를 살펴 아첨이나 하며 세상 되는 대로 따라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무릇 대각의 계사에 대해서 전하께서는 반드시 대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기시지만 사실은 이이첨에게서 나온 것이며, 옥당의 차자를 전하께서는 반드시 옥당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기시지만 사실은 이이첨에게서 나온 것이며, 전조(銓曹)의 주의(注擬)를 전하께서는 반드시 전조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기시지만 사실은 이이첨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풍지(風旨)를 받들어 그렇게 하기도 하고 그의 지휘를 받아서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비록 옳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그에게 물어본 뒤에 시행합니다. 관학 유생(館學儒生)에 이르러서도 그의 파당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관학의 소장(疏章)이 또한 겉으로는 곧고 격렬하지만 속은 실제로 아첨하며 빌붙는 내용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와 같기 때문에 자기편이 아닌 자는 비록 사람들의 중망을 받고 있는 자라도 반드시 배척하고, 자기와 뜻이 같은 자는 사람들이 비루하게 여기는 자라도 반드시 등용합니다. 모든 일을 이렇게 하고 있는데, 비록 하나하나 거론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미루어 보면 다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가 권세를 멋대로 부리고 있는 것이 또한 극도에 이르렀다고 하겠습니다. 그가 비록 보필(輔弼)의 임무를 맡은 지위에 있지는 않으나 전하께서 믿고 맡기셨다면, 그는 마땅히 나라에 충성을 다하기를 당(唐)나라의 이필(李泌)이나 육지(陸贄)와 같이 해야 하는데, 도리어 나라를 저버리기를 이렇게 하니, 신은 매우 통분스럽게 생각합니다. 성상께서는 깊은 궁궐에서 지내기 때문에 그가 이토록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가 마음대로 권세를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어질다고 여겨서 맡겨 의심을 하지 않고 계시는 것입니까? 만약 어질다고 여겨서 의심을 하지 않으신다면, 신이 비록 어리석으나 분변을 해 드리겠습니다. 신이 들으니, 임금은 어진이가 없으면 정치를 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훌륭한 임금이 위에 있더라도 임용된 신하가 불초한 사람이면 정치를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堯)가 임금으로 있는데도 곤(鯀)의 치수(治水)가 공적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지면 임용된 신하가 어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나라가 혼란스러우면 임용된 신하가 불초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오늘날을 잘 다스려지는 때라고 보십니까, 혼란한 때라고 보십니까?

지난번에 해의 이변이 거듭 나타나고 지진이 누차 발생하였으며 겨울 안개가 사방에 가득했었으니, 이는 모두 재변 가운데에서도 큰 재변이었습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그 형체가 보이지 않으면 그 그림자를 살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런 재변이 오늘날의 그림자라고 생각합니다. 태양은 모든 양(陽)의 종주(宗主)로서 임금의 표상이기 때문에, 일식(日食)이 하늘 운행의 상도(常度)인데도 《춘추(春秋)》에 일식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기록하였고, 전(傳)에는 ‘첩부(妾婦)가 그 지아비를 누르거나 신하가 임금을 저버리거나 정권(政權)이 신하에게 있거나 오랑캐가 중국을 침범하는 형상이니, 모두가 음(陰)이 왕성하고 양(陽)이 미약한 증거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흰 무지개가 해를 궤뚫는 참혹함은 일식에 견줄 바가 아닙니다. 재변은 까닭없이 생기지 않는 것이니, 어찌 그 이유가 없겠습니까. 진덕수(眞德秀)가 《대학연의(大學衍義)》에서 ‘충신의 마음은 오히려 임금이 재변을 두려워하지 않을까를 염려하는 것이니 위상(魏相)이 역적(逆賊)의 발생과 풍우(風雨)의 재변을 한 선제(漢宣帝)에게 고한 것이 이것이고, 간신의 마음은 오히려 임금이 재변을 두려워할까를 염려하는 것이니 양국충(楊國忠)이 장맛비가 농사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하여 당(唐) 명황(明皇)을 속인 것이 이것이다. 대개 임금이 하늘의 재변을 두렵게 여기면 반드시 자신의 허물을 찾아보고 반드시 폐정(弊政)을 반성하여 고치며 반드시 소인을 제거하니 이것은 충신에게는 즐거운 일이고 간신에게는 불편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 마음씀이 이렇게 다른 것이다. 근래에 왕안석(王安石)이 드디어 하늘의 재변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말을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가령 이이첨이 충신이라면 그만이거니와, 만약 이이첨이 간신이라면 오늘날의 재변을 혹 다른 나라에 전가시키거나 혹 다른 일의 증험이라고 하거나 혹은 두려워할 것이 없는 일이라고 곧바로 말할 것입니다. 신도 또한 높고 멀어 알기 어려운 일을 가지고 그에게 책임을 돌리기는 어렵기 때문에 신은 많은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오늘날 변방의 방비가 허술한 점이 많아 나라의 형세가 매우 위태롭고 아래백성들이 원망을 품어 방본(邦本)이 튼튼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인심이 매우 투박해져서 세도(世道)가 날로 떨어지고 풍속이 아주 무너져 염치가 전혀 없게 되었습니다. 위로는 벼슬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아래로 시정배에 이르기까지 신은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선비들에 대해서는 신이 함께 지내며 함께 만나는 자들이니 신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책과 붓을 가지고 공부를 하러 다니는 자들이 한갓 이록(利祿)이 있다는 것만 알 뿐이고 인의(仁義)가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과거(科擧)는 선비들이 처음으로 벼슬에 나가는 길인데, 모두들 빨리 진출할 마음을 품고 서로들 구차하게 합격할 꾀를 씁니다. 차술(借述)을 하여 권세 있는 자에게 빌붙고 주사(主司)에 교통하였다는 말을 사람들이 모두 공공연하게 꺼리지 않고 하고들 있습니다. 아비는 아들을 가르치고 형은 동생을 면려하며 친구들끼리 서로 불러다가 온통 이렇게 하고들 있으면서 돌이킬 줄을 모릅니다. 간혹 백 명 가운데에 한두 명이 이와 반대로 하면 도리어 비웃고 비난을 합니다. 심지어는 자기와 다르게 한다고 화를 내어 욕하고 헐뜯는 자도 있습니다. 아, 사기(士氣)는 나라의 원기(元氣)인데 이 지경이 되었으니, 통탄스러움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처음 임금을 뵐 때에 이와 같다면 뒷날 조정에 벼슬을 하게 되었을 때에 벼슬을 얻고자 근심하고 그 벼슬을 잃을까 근심하는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신은 삼가 생각건대, 아비와 임금을 시해하는 역적이 없다면 그만이거니와 있다면 반드시 이 무리에게서 나올 것이며, 자신을 버리고 나라에 몸 바칠 신하가 없다면 그만이거니와 있다면 반드시 이 무리에게서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선유(先儒)의 시에 이르기를 ‘이런 사람을 등용하고 이런 도를 시행하니 어느 날 태평의 시대가 올지 알지 못하겠구나.[所用是人行是道 不知何日可昇平]’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일찍이 이 시를 읊으며 천장을 쳐다보고 탄식을 하였습니다.

이이첨이 임금의 총애를 저토록 오로지 차지하고 있고 나라의 정치를 저토록 오래도록 맡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재변이 저러하고 나라의 형세가 저러하고 백성들의 원성이 저러하고 풍속이 저러하고 선비들의 습속이 저러하니, 이자가 과연 어진 자입니까, 어질지 못한 자입니까? 옛날 한 원제(漢元帝) 때에 석현(石顯)이 권세를 멋대로 휘둘렀는데 경방(京房)이 한가한 여가에 원제를 뵙고 묻기를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은 왜 위태해졌으며 등용한 사람은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임금이 밝지 못하였고 등용한 자들은 간교한 아첨꾼들이었다.’ 하였습니다. 경방이 묻기를 ‘간교한 아첨꾼인 줄을 알고서 등용하였습니까, 아니면 어질다고 여긴 것이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질다고 여긴 것이다.’ 하였는데, 경방이 묻기를, ‘그렇다면 오늘날 어떻게 그들이 어질지 못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라가 혼란스럽고 임금이 위태했었던 것을 가지고 알 수가 있다.’ 하였습니다. 경방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어진이를 임용하면 반드시 잘 다스려지고 어질지 못한 이를 등용하면 반드시 혼란이 오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유왕과 여왕이 어찌하여 이를 깨닫고서 다시 어진이를 구하지 아니했으며 어찌하여 끝내 불초한 사람을 임용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지러운 시대의 임금은 자기의 신하를 모두 어질다고 여긴다. 만약 모두 깨닫는다면 천하에 어찌 망하는 임금이 있겠는가.’ 하자, 경방이 아뢰기를, ‘제 환공(齊桓公)과 진 이세(秦二世)도 또한 일찍이 이런 임금에 대해서 듣고는 비난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렇다면 수조(竪刁)와 조고(趙高)에게 정치를 맡겨 정치가 날로 어지러워졌는데도 어찌하여 유왕과 여왕의 경우를 가지고 헤아려서 깨닫지를 못하였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직 도(道)가 있는 자라야 지난 일을 가지고 앞날의 일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경방이 인하여 관(冠)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며, 그 당시의 재변에 대한 일 및 도적을 금하지 않고 있는 일과 형벌 받은 사람이 시장에 가득한 일 등을 모두 말하고, 아뢰기를 ‘폐하께서 보시기에 오늘날이 다스려지는 시대입니까, 혼란한 시대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우 혼란한 때이다.’ 하자, 경방이 아뢰기를 ‘현재 임용한 자가 누구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러나 다행히 저 시대보다는 낫다. 또한 이 사람 때문이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하였는데, 경방이 아뢰기를 ‘지난 시대의 임금들도 또한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아마도 뒷시대에서 오늘날을 보는 것도 오늘날 옛 시대를 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도 또한 ‘다행히 저 시대보다는 낫다. 또한 이 사람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하실 것입니까? 신은 밝으신 전하께서는 반드시 한 원제의 소견과 같지는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가 이미 불초하기가 이와 같고 권세를 독차지하고 멋대로 휘두른 것이 저러하니 말류의 폐단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화란이 이를 바를 신은 감히 점치지 못하겠습니다.

과거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말은 오늘날 피할 수 없는 일상적인 이야기 거리입니다. 그런데도 이이첨이 또한 감히 변명을 하고 있으니 신은 삼가 통분스럽게 생각합니다. 자표(字標)로 서로 호응하였다거나 시권(試券)에 표식을 하였다거나 장옥(場屋)에 두사(頭辭)를 통하였다거나 시험의 제목을 미리 누출하였다는 등의 말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어찌 다 믿을 수야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난해 식년시의 강경(講經) 시험에는 높은 점수를 받은 자가 매우 많았는데 심지어 10획을 넘고도 과거에 떨어진 자까지 있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러한 때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지난 시대에 공부를 하던 자들은 힘을 다하지 않는 때가 없었는데도, 높은 점수를 받은 자가 이렇게 많은 때가 있었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은 선비들의 습속이 옛날과 달라서 사람들이 열심히 글을 읽는 때가 적은데도 도리어 이와 같으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자표로 서로 호응하였다는 일은 반드시 없었으리라고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올해의 별시 전시(別試殿試)의 급제자 가운데에는 고관(考官)의 형제와 아들과 조카 및 그들의 족속으로서 참방한 자가 10여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전시가 비록 상피하는 법규가 없다고는 하나 예로부터 어찌 한 과방 안에 상피 관계에 있는 사람으로서 합격한 자가 이렇게 많은 때가 있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이이첨과 황정필(黃廷弼)이 비록 말을 잘한다고는 하나, 상피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이 급제한 시대를 찾아서 증거를 댈 수는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시권에 표식을 했거나 장옥에 두사를 통한 일이 또한 반드시 없었으리라고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반궁(泮宮)의 시험은 정해진 시각이 있어서 성화와 같이 급하므로, 예로부터 비록 재능이 출중하고 공부를 가장 많이 하여 물이 솟구치고 산이 솟아나는 듯이 글을 지어 마치 누군가 도와주는 자가 있는 듯이 빠른 자라고 하더라도 으레 대부분은 한 편의 글을 간신히 지어내고, 혹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마무리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당대에 재능이 있다는 이름을 독차지하고 한 과방의 장원이 되는 자라고 하더라도 그가 지은 작품은 사람들의 마음에 차지 않으며 혹 염(簾)을 어긴 구절도 많고 혹 지우고 고친 글자가 많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이 금년의 반시(泮試)를 보니, 글제를 내걸었다가 금방 파하였는데도 명지(名紙)에 즉시 글을 지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오늘날의 시험장에 일찍이 예전에 없었던 이토록 탁월한 인재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듣지 못하였으며, 설령 밖에서 때에 임하여 지어서 들여왔다면, 귀신이 도와주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이렇게 민첩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 뒤에 들으니, 그 작품들이 자못 훌륭하여 논란을 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치로 헤아려 보건대 참으로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글제를 미리 유출시켜 집에서 지어오게 하였다는 말이 또한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진사 민심(閔)은 바로 신의 아비와 같이 급제한 사람의 아들인데, 이이첨의 당류이며 신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자입니다. 반시(泮試)가 있기 며칠 전에 신의 친구 전 첨지(僉知) 송희업(宋熙業)의 편지를 가지고 와서는 신의 《사문유취(事文類聚)》를 빌려보고자 하였습니다. 신이 전체를 빌려주고 싶지가 않아서 몇째 권을 보고자 하는지를 물었더니, 청명절(淸明節)이 들어 있는 권이었습니다. 그 권이 마침 신의 서실(書室)에 있었기 때문에 갖다가 주었습니다. 민심이 말하기를 ‘다른 권도 보고자 합니다. 전질을 빌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기에 신이 그 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굳이 물었더니, 민심이 말하기를 ‘등촉부(燈燭部)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것이 들어 있는 권은 친가(親家)에 있으니 어떻게 합니까?’ 하였더니, 민심이 ‘사람을 시켜서 갖다 주십시오.’ 하였는데, 신이 ‘찾으러 보낼 사람이 없습니다.’고 하자, 민심이 ‘제가 가서 찾아오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신이 ‘안방에 보관되어 있어서 외부 사람이 찾을 수가 없습니다.’고 하니, 민심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그대가 내 말을 타고 가서 가져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신이 ‘지금 다른 손님을 대하고 있으므로 갈 수가 없습니다.’고 하였더니, 민심이 이에 망연자실하여 일어나서 가려고 하지를 않더니 오랜 뒤에 어찌할 수가 없자 단지 그 권만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에 간신히 가져올 수가 있었는데, 뒷날 반궁의 시험장에 들어갔더니, 바로 유류화(楡柳火)라는 제목이 걸려 있었습니다. 《사문유취》에서 찾아보니 이것은 청명절에 하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등촉부에도 볼 만한 글이 많이 있었습니다. 신이 비로소 이상하게 여기며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성상께서 친림하시어 임금의 위엄이 지척에 있는데도 감히 미리 유출했던 제목을 출제하였으니,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드러난 것이다. 이이첨이 이렇게까지 되었단 말인가.’ 하였습니다.

시험장에 들른 일이 있은 뒤에 신이 신의 7촌 아저씨인 유학(幼學) 윤유겸(尹唯謙)을 만났는데 민심의 일에 대한 말이 나오니, 유겸이 말하기를 ‘반시를 시행하기 며칠 전에 어떤 친구가 나에게서 이 두 권을 빌려 갔다.’고 하였습니다. 그 성명을 물어 보았더니, 역시 이이첨의 당류였습니다. 신은 성품이 소루하고 게을러 교유(交遊)를 끊고 출입을 삼가고 있으므로 세간의 일에 대해서 귀머거리나 장님과 같은데도 신이 들어서 아는 바가 이와 같고 보면,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일들을 보았겠습니까. 그리고 이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미루어 본다면 길에 나도는 말들이 또한 근거가 있는 말일 듯합니다.

이이첨의 네 아들이 모두 미리 시험 문제를 알아내거나 차작(借作)을 하여 과거에 오른 일에 대해서, 온 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말을 하고 있습니다. 대개 그 네 아들이 혹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재주와 명망이 없는데도 잇따라 장원을 차지하기도 하였고 혹은 전혀 문장을 짓는 실력이 없는데도 과거에 너무 쉽게 오르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이첨의 도당들이 이미 과거를 자신들의 소유물로 삼았다면, 이이첨의 아들들에 대한 일은 많은 말로 논변할 것도 없기 때문에 신은 다시 운운하지 않겠습니다. 신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인정상 박절함을 면치 못하고 또한 잗단 일이라는 것을 압니다만, 과거가 이토록 공정치 못한 것은 국가에 관계되는 바가 매우 크기 때문에, 이런 것들은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이이첨이 관작(官爵)으로써 벼슬아치들을 끌어 모으고 과거로써 유생들을 거두어들여 권세가 하늘을 찌를듯하므로 온 세상이 그에게로 쏠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합니다.

옛날에 제(齊)나라의 전씨(田氏)가 큰 덕(德)은 없어도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푸는 일이 있자920) 안자(晏子)가 경공(景公)에게 간하기를 ‘대부의 집안에서 베푸는 혜택은 나라 전체에 미쳐서는 안 되고, 대부는 군주의 이익을 자신이 취하지 않는 법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관작과 과거를 가지고 혜택을 베푸는 것이 어찌 쌀을 나누어주며 혜택을 베푸는 것과 같겠으며, 벼슬아치와 유사(儒士)들이 귀의하는 것이 어찌 일반 백성들이 귀의하는 것과 같겠습니까. 진덕수(眞德秀)가 《대학연의》에서 말하기를 ‘전씨의 화근은 경공의 시대에는 그래도 막을 수가 있었지만 이미 세월이 오래 지나게 되어서는 막을 수가 없었다. 분변해야 옳은 일을 어찌 일찍 분변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아, 어찌 이것뿐이겠습니까.

이원익(李元翼)은 우리 나라의 사마광(司馬光)이며, 이덕형(李德馨)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에 몸바친 사람이며, 심희수(沈喜壽)는 비록 대단한 재능과 덕망은 없습니다만 우뚝하게 소신을 가지고 굽히지 않은 사람이니 또한 종묘사직에 공로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이첨이 모두 삼사(三司)를 사주하여 끊임없이 논집해서 잇따라 귀양을 보내고 내쫓게 하였습니다. 다행히 성상께서 온전하게 돌보아 주시어 금부에 내리려던 계책을 이루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유희분(柳希奮)과 박승종(朴承宗)은 집안을 단속하지 못하고 몸가짐을 엄하게 하지 않으니 참으로 하찮고 용렬한 자들입니다. 이이첨이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도, 바른 말로 논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쟁집하지 아니하니, 참으로 겁 많고 나약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모두 나라의 훈척(勳戚) 중신(重臣)으로서 국가와 휴척(休戚)을 함께하고 안위(安危)를 함께할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이첨이 원수처럼 보고서 반드시 중상(中傷)을 하려고 하니, 그 의도가 흉참합니다. 그가 겉으로 화호(和好)를 하면서 혼인을 맺고자 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그가 박승종과는 본디 혼인(婚姻)한 집안인데도 서로 잘 지내지 못하니 어찌 이익이 없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대개 유희분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도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기는 권세가 없어서 유희분을 두렵게 여기고 있는 것처럼 하여 우호를 맺으려는 태도를 보이려는 것입니다. 그 계책이 참으로 교묘합니다.

옛날에 나라의 권세를 오로지 쥐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세신(世臣)과 공족(公族) 및 재능과 공덕(功德)이 자기보다 나은 자를 제거한 뒤에 감히 자기 마음대로 권세를 부렸습니다. 전항(田恒)과 조고(趙高)와 이임보(李林甫) 및 기타 소인들의 일에서 분명하게 상고할 수가 있습니다.

김제남은 반역을 한 정상이 분명하여 덮어 가릴 수가 없었으니, 하늘과 땅과 귀신과 사람이 모두 함께 죽인 자입니다. 이원익 등이 풍병이 들어 정신이 나간 사람이 아니라면 무슨 마음으로 역적을 비호하고 우리 성상을 저버리겠습니까. 이이첨 등이 호역(護逆)이라는 두 글자로 하나의 큰 그물을 만들어서, 나라에 충성하고 임금을 사랑하며 그들과 더불어 함께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 자가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을 가지고 때려잡았습니다. 이 이름이 한번 더해지면 해명할 말이 없으며 벗어날 계책이 없게 됩니다. 소인(小人)이 선류(善類)를 함정에 밀어 넣는 것은 그 계책을 씀이 대개 이와 같습니다. 아, 두려운 일입니다.

홍무적(洪茂績)·정택뢰(鄭澤雷)·김효성(金孝誠) 등도 이 그물에 걸려 세상에 큰 누(累)가 되었고 영원히 언로(言路)가 막혔습니다.

원이곤(元以坤)은 어떠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세상의 기휘(忌諱)를 범하면서 남들이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을 감히 말한 자입니다. 그러나 신이 그 상소의 사연을 보았더니, 그의 말이 처음부터 끝까지 두려움에 차 있었고 패기도 없고 정신도 나약하여, 강직한 자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닌듯 하였습니다. 더구나 ‘명예를 훔친 낙양의 소년’이라는 말은 길에 흘러 다니는 말인데, 성상께 진달하기까지 하였으니, 그것이 이이첨이 말을 꾸며 스스로 해명을 할 기화가 된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시사를 말한 초야의 사람이 형장을 받기까지 한다면 뒷날 위망이 눈앞에 닥치는 일이 있더라도 누가 목숨을 버려가면서 말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언자(言者)에게 비록 광망(狂妄)한 잘못이 있더라도 성인(聖人)은 죄를 다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대(銀臺)의 계사와 대간의 논열이 마침내 형구를 씌워 옥에 가두고 고문을 하여 형장을 받게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이임보(李林甫)가 어사(御史)에게 넌지시 일러 봉장(奉璋)을 죽이게 한 것921) 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신이 이른바 후설과 이목을 맡은 관원이 모두 그의 복심이라고 한 것을 이것을 가지고 알 수가 있습니다. 그가 복심을 요직에 포진시킨 것은 어떤 방법으로 하였겠습니까. 우리나라의 옛 전례에 당하관의 청망(淸望)은 모두 전랑(銓郞)의 손에서 나오며, 당상관의 청망도 완전히 전랑의 손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더라도 전랑이 막으면 의망할 수가 없습니다. 전랑의 직임이 역시 중요하지 않습니까. 이와 같기 때문에 반드시 널리 공론을 모아서, 한 시대의 명류(名流)로서 명망과 실상을 함께 갖춘 자를 힘써 얻어서 전랑을 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아무도 사사로움을 부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박홍도(朴弘道)와 박정길(朴鼎吉)은 이이첨에게는 골육과 같은 자들이고 대엽(大燁)에게는 천륜(天倫)을 함께한 형제와 같은 자들인데, 이이첨이 이 두 사람을 전랑에 배치하였습니다. 박홍도는 조금이라도 자기의 뜻에 맞지 않으면 곧바로 물리쳤습니다. 또 그의 아들 대엽과 익엽(益燁)을 잇따라 전랑에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전랑의 중요성은 앞에서 진달한 바와 같은데, 참으로 이이첨의 골육과 같은 자 및 진짜 골육이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미루어 본다면 전후의 전랑들은 반드시 모두 그의 골육과 같은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박홍도와 박정길이 골육과 같고 형제와 같은데 전랑에 배치하였다는 말은 신이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이대엽이 집의로 있을 때에 올린 계사 가운데에 이러한 말이 있었으니 이는 성상께서도 보신 바입니다. 전랑들이 모두 그의 골육과 같은 자들이거나 진짜 골육이라면 전조(銓曹)가 주의(注擬)한 사람들이 모두 그의 복심이라는 것은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미루어 보건대, 무릇 과거의 고관(考官)들도 또한 모두 자기의 복심으로 임명하였을 것입니다. 관학의 유생들이 모두 그의 도당이 된 것은 어째서 그렇겠습니까. 과거로 그들을 수합하였기 때문입니다. 황정필(黃廷弼)의 상소의 사연은 한(漢)나라 사람들이 왕망(王莽)의 공덕을 찬양한 것과 다름이 없을 듯합니다. 신은 차마 보지 못하겠습니다.

아, 이이첨의 도당이 날로 아래에서 번성하고 전하의 형세는 날로 위에서 고립되고 있으니, 어찌 참으로 위태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전하를 위하여 말을 하는 자가 없습니다. 아, 우리나라의 3백여 개의 군(郡)에 의로운 선비가 한 사람 도 없단 말입니까. 유희분과 박승종과 같은 자들은 의리상 휴척을 함께해야 하는데도 오로지 몸을 온전히 하고 처자를 보호할 마음으로, 임금의 위망을 먼 산 보듯이 보며 구제하지 아니하니, 그들이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죄가 큽니다. 다른 사람들에게야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어리석은 신이 앞뒤로 올린 글을 자세히 살피시고 더욱 깊이 생각하시어, 먼저 이이첨이 위복을 멋대로 농단한 죄를 다스리시고 다음에 유희분과 박승종이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죄를 다스리소서. 그 나머지 이이첨의 복심과 도당들에 대해서는, 혹 당여를 모조리 제거하는 율법을 시용하기도 하고 혹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들을 용서하는 율법을 사용하기도 하소서. 그러면 종묘사직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그러나 《춘추》 전(傳)에 이르기를 ‘만연되면 제거하기 어렵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미 만연되었으니 제거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조심하고 조심하소서. 신이 비록 어리석으나 흰색과 검은 색도 분변 못하는 자는 아니니, 어찌 이런 말을 하면 앙화가 뒤따른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더구나 홍무적(洪茂績) 등은 이이첨의 죄상을 조금도 지적하지 않았는데도 바다 밖으로 귀양을 갔고, 원이곤(元以坤)은 과거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조금 진달하였다가 화를 당하여 옥에 갇혔습니다. 신이 말한 것은 모두 선배들이 말하지 않았던 것으로서 온 나라에서 한 사람도 감히 말하지 않은 것이니, 신이 당할 앙화의 경중은 앉아서 알 수가 있습니다.

진덕수가 《대학연의》에서 말하기를 ‘간신(奸臣)이 나라의 권세를 독차지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언로(言路)를 막아서 임금으로 하여금 위에서 고립되어 밖의 일을 보지 못하게 한 뒤에 그 욕망을 멋대로 부리는 것이다. 그래서 크게는 나라를 찬탈하고 작게는 권세를 잡고 정치를 멋대로 하여 못하는 짓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선(正先)이 죽자 조고(趙高)가 정치를 멋대로 하였고922) 왕장(王章)이 죽음을 당하자 왕봉(王鳳)의 권세가 더욱 치성해졌으며923) 두진(杜璡)이 쫓겨나자 이임보(李林甫)가 전횡을 하였다.’924)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또한 신이 평소 알고 있던 바입니다. 옛날에 일을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 임금이 용납을 하고 죄를 주지 않으면 간신이 반드시 간교한 꾀로 모함을 하여, 혹 다른 일을 가지고 몰래 중상을 하여 죽이기도 하고 혹 귀양을 보내놓고는 그곳 수령을 시켜서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이것 또한 신이 평소 염려하던 바입니다. 성인(聖人)께서 말을 공손하게 하라는 경계를 하셨고 몸을 보전하는 방도를 일렀으니, 이 뜻을 신이 또한 조금은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위태한 말을 이렇게 하는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신의 집안은 3대 동안 국가의 녹을 먹었고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니, 만약 나라에 위급한 일이 일어나면 국난(國難)에 달려 나가 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간신이 나라를 그르치는 것이 이러하고 나라가 위태롭기가 이러한데, 남쪽과 북쪽의 오랑캐들이 이런 틈을 타서 침입해 온다면, 비록 난리를 피하여 구차스럽게 살고자 하더라도 또한 좋은 방책이 없을 것이며 꼼짝없이 어디 도망갈 곳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 보탬도 없는 곳에서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오늘날 전하를 위해서 죽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신의 말을 옳게 여기신다면 종묘사직의 복이요 백성들의 다행일 것이며, 비록 옳지 않다고 여기시어 신이 죽게 되더라도 사책(史冊)에는 빛이 나게 될 것입니다. 신은 깊이 생각하였습니다.

다만 신에게는 노쇠하고 병든 늙은 아비가 있는데, 이 상소를 올리는 신을 민망하게 여겨서 온갖 말로 중지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신이, 죽기는 마찬가지라는 이치를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자세히 말씀을 드리고 또한 임금과 신하 사이의 큰 의리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의 아비는 금지시키고자 하면 나라를 저버리게 될까 염려되고 그대로 들어주자니 아들이 죽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불쌍하여 우두커니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상소를 올림에 미쳐서는 신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용감하게 결단을 내리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지경에 이르고 보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인자하신 성상께서는 비록 신에게는 무거운 벌을 내리시더라도 신의 늙은 아비에게까지는 미치지 않도록 하시어, 길이 천하 후세의 충신과 효자들의 귀감이 되게 하소서. 참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간절하게 바라는 바입니다. 신이 진달할 말은 이것뿐만이 아니나 글로는 뜻을 다 말씀드리지 못하여 만분의 일이나마 아뢰는 바입니다. 전하께서 왕좌에 계시면서 조용한 시간에 《대학연의》의 변인재(辨人才) 등의 조항을 가져다가 마음을 비우고 자세히 읽어보시면 군자와 소인의 정상에 대해서 더욱 분명하게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조정의 격례(格例)를 알지 못하여 말이 대부분 차서가 없으니 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하였다. 그 뒤에 양사의 합계로 전교하기를, “윤선도를 외딴 섬에 안치(安置)하라. 윤유기(尹惟幾)는 윤선도와는 전혀 다르니 단지 관작을 삭탈하기만 하여 시골로 내려 보내라.” 하였다.【〈윤선도는 윤유기의 양자(養子)이다. 윤유기는 본래 이이첨의 당류였으나 이이첨이 거두어 써주지 않았다. 윤선도의 상소가 들어가자 왕이 자못 의혹을 하였는데, 이이첨이 밤낮으로 호소하며 애걸하였기 때문에 이에 풀려났다. 윤유기는 본디 명류(名流)들을 질투하였고, 또 김제남의 옥사를 두고 억울한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역모를 한 정상은 길가는 사람들도 안다고 하는 말을 하였다. 사람들이 이 때문에 하찮은 사람으로 여겼다. 그러나 윤선도는 이 상소 때문에 온 나라에 명망이 높아졌다.〉 】]

  ○ 광해 111권, 9년(1617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1월 4일(경오) 8번째기사  
   귀천군· 금산군· 금계군 등 19인이 이이첨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다  

[종실인 귀천군(龜川君) 이수(李晬)·금산군(錦山君) 이성윤(李誠胤)·금계군(錦溪君) 이인수(李仁壽)·낭성군(琅城君) 이성윤(李聖胤)·춘계 도정(春溪都正) 이원(李黿)·선성도정(宣城都正) 이신윤(李愼胤)·회은 부수(懷恩副守) 이덕인(李德仁)·금평령(錦平令) 이의수(李義壽)·능성정(綾城正) 이명윤(李明胤)·금릉정(金陵正) 이득수(李得壽)·부림수(富林守) 이창윤(李昌胤)·창림 부수(昌林副守) 이세지(李世智)·덕원령(德原令) 이혼(李渾)·회의령(懷義令) 이철남(李哲男)·숭림령(崇林令) 이방윤(李芳胤)·금림령(錦林令) 이개윤(李乾胤)·의산 부령(宜山副令) 이인윤(李仁胤)·견성 부령(甄城副令) 이현윤(李賢胤)·성산령(星山令) 이의윤(李義胤) 등 19인이 상소하기를, “신들은 모두 종척(宗戚)의 신하들로 조정 사이의 일에 대해서는 귀머거리나 장님과 같아서 백에 하나도 알지 못하며, 간혹 한두 가지 들은 것이 있더라도 그 해가 종사를 위태롭게 하는 데 이르는 것이 아니면 신들이 감히 말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시비와 득실이 종사를 위태롭게 하는 데 크게 관계될 경우, 신들은 모두 나라가 살면 함께 살고 나라가 망하면 함께 망하는 사람들이니, 어떻게 종사가 망하는 것을 앉아서 보면서 마치 소가 닭 보듯 할 수 있겠습니까.

예조 판서 이이첨은 간사하고 악독하며 괴팍하고 교활하여, 사당(私黨)을 널리 심고 충신들을 모두 내쫓았으며 국권을 농락하여 위세가 날로 성해지게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붙좇는 자는 아무리 완악하고 염치없으며 언행이 패려한 자라도 반드시 이끌어 주어 승진시키고, 자기에게 반대하는 자는 아무리 학문이 높고 행실이 뛰어나서 세상 사람들이 떠받드는 자라도 반드시 배척해서 물리쳤습니다. 기염이 하늘까지 치솟아 길가는 사람들이 눈짓들만 하고 있으며,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들이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움 추리고 있고 간사하고 사특한 자들이 팔을 휘두르며 몰려들고 있습니다. 조정의 대소 신하들 가운데 비록 혹 그의 형세에 붙좇지 않는 자가 있더라도, 끝까지 그의 집에 찾아가지 않을 경우에는 능히 보전하는 자가 드무니 밤에는 천장을 쳐다보며 탄식하고 낮에는 그의 집 문 앞에서 설설 기고 있습니다. 심지어 함께 어울리는 사람에 이르러서도 혹 한두 가지 일이 조금이라도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있으면 온갖 계책으로 중상하여 반드시 배척한 연후에야 그만둡니다.

이이첨의 위세는 날로 아래에서 성해지고 전하의 위세는 날로 위에서 고립되고 있으니, 위망의 화가 조석에 박두하였습니다. 비록 충신과 의사가 있어서 이와 같은 정상을 진달하고자 하더라도 입 밖으로 말을 내기만 하면 큰 화가 그 즉시 이릅니다. 그러므로 부자와 형제가 함께 같은 방에 있으면서 이이첨에 대해서 말이 나오면 입을 가리고 손을 내저으면서 멸족(滅族)된다고 서로 경계하고 있습니다.

아, 국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크게 걱정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초야에 있는 신하 윤선도가 강개하여 상소를 올려서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바를 감히 말하였습니다. 그러니 비록 송나라의 호전(胡銓)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원에서 먼저 일어나자 삼사가 잇따라 일어나고 사학(四學)과 반궁(泮宮)이 이구동성으로 호응하여, 한편으로는 역적을 편들었다고 하고, 또 한편으로는 어진이를 모함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른바 역적이라고 하는 것은 전하에게 거역했다는 것입니까, 이이첨에게 거역했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들이 이른바 어진이라고 하는 자는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만약 그들을 공격하는 말을 한 것을 가지고 역적질을 했다고 지적한다면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이에 이르러 드러나는 것입니다.

아, 위복의 권한을 마구 농락하는 것은 신하로서 극악대죄를 짓는 것으로, 이 죄명이 한번 가해졌으면, 이이첨으로서는 마땅히 석고대죄하고 반성하면서 형벌이 내리기를 기다리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태연스럽게 집에 있으면서 더욱 그 독기를 뿜어 삼사를 불러 모으고 관학(館學)을 지휘하였으며, 조금도 거리낌 없이 자신을 스스로 찬양하여 배도(裵度)와 한기(韓琦)에게 비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아, 이이첨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삼사는 전하의 눈과 귀이고 관학은 공론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서로 도와 악한 짓을 하면서 이이첨을 칭송하여 이르지 않는 바가 없으니, 오늘날의 삼사가 전하의 삼사인지 이이첨의 삼사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라의 정권이 이이첨에게 돌아갔다는 것을 이에 근거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예전에 왕망(王款)이 태아검(太阿劍)을 거꾸로 잡았을 때930) 장우(張禹)·공광(孔光)·두흠(杜歆)·곡영(谷永) 등의 무리가 서로 더불어 찬성(贊成)하였고, 글을 올려서 왕망을 찬양한 자가 무려 50, 60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간신이 나라를 멋대로 하여 위권(威權)이 아래로 돌아가면 아첨하는 풍조가 만연되는 것은 고금이 같은 이치인 것으로, 찬양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그것을 공론이라고 할 수 없음이 분명하고도 분명합니다. 어찌하여 삼사와 관학은 도리어 직언을 한 사람을 배척하고, 간사한 이이첨을 찬양하기를 이렇게까지 극도로 한단 말입니까. 이와 같은 짓을 멈추지 않는다면 뒷날의 화가 헤아리기 어려울 듯합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굽어 살피소서. 무릇 임금이 간언을 듣는 방도는 그 말이 쓸 만하면 쓰고 그 말이 쓸 만하지 못하면 버려두는 것입니다. 말한 자가 논한 바가 만약 시의(時議)에 합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곧바로 배척하고 심하게 다스린다면 간사한 자가 국권을 잡게 되어 진언하는 말은 모두 아첨하는 말들뿐이고 충직한 논의는 나올 길이 없을 것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대간(大奸)은 충성스러운 듯하고, 대사(大詐)는 미더운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이이첨에게 모든 것을 내맡기고 의심치 않는 것은 총명이 가려진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지금 이이첨을 구원하는 자들은 그를 두고 역적을 토벌한 신하라고 하는데, 역적을 토벌하는 것은 천하의 대의(大義)이고 고금의 상경(常經)입니다. 그러니 전하의 조정에 그 누가 역적을 토벌한 신하가 아니겠으며 그 누가 역적을 토벌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가령 어떤 사람이 여기 있는데 아침에 녹훈할 만한 공을 세우고 저녁에 용서하기 어려운 죄를 저질렀을 경우, 그를 두고 공이 있다고 하면서 그 죄를 다스리지 않겠습니까? 이이첨이 간사함이 이와 같고 위권이 이와 같고 국권을 마구 농단하기가 이와 같으며, 국세가 위급하기가 이와 같고 사람들이 울분을 품기가 이와 같은데도, 종사(宗社)에 해가 없다는 것을 신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아, 이이첨이 헛말을 날조하여 자기의 반대파를 축출하고, 과거시험과 관작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아, 형세를 좇고 이익을 탐내는 무리들이 요직에 가득 들어차 있으니, 식자들이 한심해 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아, 이익을 좇음이 극도에 이르면 반드시 빼앗지 않고는 만족하지 않는 데 이르며, 자리를 잃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심해지면 반드시 임금과 아비를 시해하는 데 이르는 법이니, 성인(聖人)이 미리 경계하신 것이 엄하고도 절실합니다.

전하께서 윤선도의 일 때문에 대신들에게 수의(收議)한 것은 여론이 어떠한가를 알고자 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영상 기자헌은 이이첨의 기세에 겁을 집어먹어 병을 칭탁하고 의논드리지 않았으며, 우의정 한효순 역시 그의 기세를 두려워하여 기가 꺾이고 말을 더듬으면서 ‘언로(言路)’니 뭐니 하면서 몇 글자만 대략 진달 드렸을 뿐입니다. 그런데 삼사는 공격하면서 여력을 남기지 않았으니, 임금을 잊고 역당을 비호하기를 어찌 이렇게까지 한단 말입니까.

지금 윤선도의 상소가 한번 전하께 진달되었으니 이이첨이 국권을 농락한 죄를 성상께서 반드시 이미 통촉하시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결단을 내리셔서 멀리 내쫓지 않으시니, 뒷날의 근심이 오늘날보다 더 심할 것입니다. 송나라 신하 사마광(司馬光)이 말하기를 ‘임금이 신하에 대해서 그의 간악함을 모르는 데 걱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혹 알고서도 다시 용서해 준다면 차라리 알지 못하는 것이 더 낫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가 혹 간사한 짓을 하였는데 위에서 그것을 모를 경우에는 오히려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나, 이미 알고서도 토벌하지 못하여서 그가 족히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방종하게 굴면서 돌아보는 바가 없게 된다. 이 때문에 선한 줄 알고서도 쓰지 않거나 악한 줄 알면서도 제거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임금이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은 사마광의 이 말이 바로 오늘날을 위하여 말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들은 이이첨과 본디 원수진 일이 없으며, 또 권세를 다투어 서로 알력을 일으킬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가 비록 뜻을 얻는다 할지라도 신들에게 있어서 무슨 해가 있겠으며, 그가 비록 세력을 잃는다 하더라도 신들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다만 신들은 모두 국가와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는 신하로서 종사가 망하는 것을 앉아서 보기만 하고 구하지 않는다면 종친(宗親)이 되고 왕족(王族)이 된 의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신들은 참으로 아침에 이 상소를 올릴 경우 저녁에 삼사에서 죄주기를 청하는 것이 윤선도에 대해서 한 것보다 더 심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충분(忠憤)이 격발되어 말을 가려서 하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속히 권간을 축출하여 종사를 안정시키고, 그 다음으로 삼사가 악인을 편든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는데,【금산군(錦山君) 이성윤(李誠胤)의 계사이다. 】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모두 알았다. 다만 조정의 대체(大體)는 종척의 여러 경(卿)들이 간여할 일이 아닌데, 조섭하고 있는 이때 이렇게 번거롭게 아뢰니, 누구의 사주를 받고 이 상소를 올린 것인가? 밝은 해가 하늘에 있으니 곧이곧대로 대답하라.” 하였다.]

○ 광해 113권, 9년(1617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3월 9일(갑술) 7번째기사
   이이첨·박승종·유희분 등이 모여서 지은 시의 내용  

[ 이이첨·박승종·유희분이 장원서(掌苑署)에 모여서 향을 피우고 시를 지어서 맹세하였는데, 왕이 중사(中使)를 보내어서 궁중의 술을 하사하고 장려하였다. 이 당시에 이들 세 집안이 모두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은 권세를 끼고 각자 도당(徒黨)을 세워 서로 알력이 있었는데, 이이첨이 폐모론(廢母論)을 주도하면서부터는 기세가 몹시 치성하여서 유희분과 박승종이 대적할 수가 없었다. 이이첨이 허균(許筠)을 사주하여 화살에 묶어서 격문(檄文)을 쏘아 넣은데 미쳐서는, 격문 안의 말이 몹시 흉패스러워서 심지어는 ‘위얼(僞孽)이 외람되이 왕위에 올랐으며, 아버지를 독살하고 어머니를 잡아가두었으며, 형을 죽이고 동생을 죽였다.’는 등의 말이 있기까지 하였다. 영상 기자헌이 이에 대한 단서를 발하고 민인길(閔仁佶) 등이 서로 이어서 고변하여, 왕이 허균이 한 짓임을 알았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하여 대비(大妃)를 폐하는 일을 성사시키고자 해서 내버려 둔 채 불문에 붙였다. 그러나 박승종과 유희분 등이 몹시 몰아붙여 이이첨의 처지가 크게 궁색하게 되었다. 이에 감언이설로 유희분과 박승종을 꾀어 동맹을 맺어서, 대북(大北)과【이이첨의 당파이다. 】중북(中北)과【정창연(鄭昌衍)의 당파이다. 】 소북(小北)을【유희분·박승종의 당파이다. 】균등하게 등용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날 장원서의 모임에 이들 세 사람과 이병(李覮)【정창연의 도당이다. 】·이창후(李昌後)·유희발(柳希發) 등이 모두 모였으며, 무인인 성우길(成佑吉)이【유희분과 인척관계에 있다. 】여기저기 오가면서 말을 전하였고, 이응해(李應獬)가【박승종의 가신(家臣)이다. 】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함께 참석하였으며, 시를 지어서 맹세하였는데, 왕이 이 사실을 듣고는 몹시 기뻐하여 수서(手書)를 내렸다. 거기에 ‘병중에 경들의 모임에 대해 들었는바, 이는 종사의 복이다. 내가 몹시 기쁘고 가상하게 여긴다.’고 하였다.

이이첨은 시를 짓기를,
이 모임은 봄놀이를 즐기려 함 아니라
서로 모여 속마음을 토로코자 함이네
매화꽃도 역시나 우리들의 뜻 알고서
봄기운 먼저 알고 맑은 향기 풍겨오네
하고, 박승종은 시를 짓기를,
구일 동안 바쁘다가 십일 만에 만나니
그 동안에 쌓인 회포 얼마나 애달팠나
찬 매화 꼿꼿한 대 맑은 운치 같이 하니
향기로운 내온 술에 모두가 취 하누나
하고, 유희분은 시를 짓기를,
그대여 말을 말라 한망(閑忙)이 다르다고
철석간장 더욱더 굳세기만 원할 뿐
오얏 복사 희고 붉음 나와는 상관없어
한겨울 송백(松柏) 간은 절개보전 기약 하네
하고, 이병은 시를 짓기를,
아전들아 말을 말라 숙직에 바쁘다고
우리들의 이 담론은 흉금을 다 쏟는다네
뜨락 가득 저 꽃들은 볼수록 더 좋은데
한스런 건 내 곁에 해어향(解語香)이 없는 걸세
【해어향(解語香)은 이경전(李慶全)을 가리킨다. 이경전은 정창연의 당파로 떨어져 나와 중북(中北)이 되었다. 】
하고, 이창후(李昌後)는 시를 짓기를,
서연(書筵)이 끝난 뒤에 바쁘게 문을 나서
신선의 차를 구해 뱃속을 씻어냈네
오늘 모임 우연 아님 분명히 알 것이니
이곳에 핀 매화 향기 모름지기 기억 하소서
하고, 유희발은 시를 짓기를,
뜬세상의 세월은 섬광 같이 흐르는데
어찌하여 외물에 마음을 끌리리오
마음 합해 협력해서 무위지치 이룩하여
요순시대 어진 정치 그 향기를 맡아보세
하였다. 이이첨이 또 고시(古詩)를 지었는데, 그 시에,
세 사람이 이 모임 주선했으니
그 뜻을 어이하여 잊으오리오
형제간에 서로 다퉈 의가 상하면
부모가 걱정 속에 속이 썩는 법
우리들이 마음 합해 한 몸 됐으니
간교한 말 나불대며 떠들어 대리
지금부턴 서로 간에 의심을 말고
나라와 우리 운명 함께 하세나
대의는 역적 토벌 하는 데 있고
공도는 어진이의 등용에 있네.
황천이 이 땅 위에 임하여 있고
귀신 역시 우리 곁에 임해 있다네.
각자가 빛난 이름 보전하면서
힘을 다해 우리 임금 섬기어보세  하였다.
이 모임에서 이이첨이 정조(鄭造) 형제를 버리기로 약속하였는데, 정조가 분을 품고 이이첨의 집에다가 시를 써 붙이기를,
서로 친해 오가면서 일마다 바쁘더니
바쁜 중의 일들이라 모두가 꼬였다네.
정원에 핀 저 꽃은 봄날에만 꽃피는 법
가지에서 떨어지면 향기 절로 끊기리라
하였다. 그 뒤에 세 집안이 끝내 서로 화합하지 못하여서 대비(大妃)를 폐위하기를 청하는 정청(庭請)이 일어나게 되었다.]

○ 광해 111권, 9년(1617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1월 22일(무자) 3번째기사
   우의정 한효순이 정사하나 불허하는 비답을 내리다  
○ 광해 113권, 9년(1617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3월 23일(무자) 1번째기사
   우의정 한효순이 사직하기를 상차하나 불허하다  
○ 광해 119권, 9년(1617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9월 21일(계미) 2번째기사
   우의정 한효순이 정사하니, 만류하고 내의를 보내 병을 보살피게 하다  
○ 광해 123권, 10년(1618 무오 / 명 만력(萬曆) 46년) 1월 4일(갑자) 5번째기사
   우의정 한효순 등이 백관을 인솔하고 정청하여 폐모론을 주장하다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이 연원 부원군(延原府院君) 이광정(李光庭), 행 지중추 박홍구(朴弘耉), 좌찬성 박승종(朴承宗), 병조 판서 유희분(柳希奮), 공조 판서 이상의(李尙毅), 예조 판서 이이첨(李爾瞻), 여천 부원군(驪川府院君) 민형남(閔馨男), 형조 판서 조정(趙挺), 판중추 노직(盧稷), 한평군(韓平君) 이경전(李慶全), 우찬성 이충(李沖), 이조 판서 민몽룡(閔夢龍),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 길성위(吉城尉) 권대임(權大任), 한산군(漢山君) 조진(趙振), 문평군(文平君) 유공량(柳公亮), 판윤 윤선(尹銑), 청릉군(淸陵君) 김신국(金藎國), 한남군(漢南君) 이필영(李必榮), 호조 판서 최관(崔瓘), 우참찬 유간(柳澗), 행 동지 심돈(沈惇), 행 사직 김경서(金景瑞)·조의(趙誼), 이조 참판 유몽인(柳夢寅), 일선위(一善尉) 김극빈(金克鑌), 공조 참판 조탁(曺倬), 행 호군 남근(南瑾)·유경종(柳慶宗)·송석경(宋錫慶)·이선복(李善復)·여우길(呂佑吉)·정문부(鄭文孚)·윤휘(尹暉)·박이서(朴彝敘), 동지 박정현(朴鼎賢)·박자흥(朴自興), 예조 참판 윤수민(尹壽民), 병조 참판 이덕형(李德泂), 호조 참판 경섬(慶暹), 좌윤 김개(金闓), 우윤 이원(李瑗), 행 대사성 조존세(趙存世), 행 판결사 박경신(朴慶新), 행 돈령도정 이형욱(李馨郁), 완산군(完山君) 이순경(李順慶), 한흥군(漢興君) 조공근(趙公瑾), 하청군(河淸君) 정희현(鄭希玄), 풍안군(豐安君) 임연(任兗), 석흥군(碩興君) 이척(李惕), 원양군(原陽君) 송강(宋康), 익흥군(益興君) 이응순(李應順), 운성군(雲城君) 신경행(辛景行), 길천군(吉川君) 권반(權盼), 봉산군(逢山君) 정상철(鄭象哲), 영평군(鈴平君) 윤중삼(尹重三), 석릉군(石陵君) 전룡(全龍), 해신군(海愼君) 이희령(李希齡), 분병조 참판 김지남(金止男)·이성길(李成吉), 행 훈련 도정 유승서(柳承瑞), 행 부호군 유지신(柳止信), 행 사직 우치적(禹治績)·안륵(安玏)·원근(元瑾)·박봉수(朴鳳壽)·유몽룡(劉夢龍)·전윤(田潤)·이현(李玹)·원유남(元裕男)·이백복(李伯福)·박덕린(朴德獜)·변응지(邊應祉)·김응함(金應緘)·유순무(柳舜懋)·민형(閔泂)·이은종(李殷宗)·이충길(李忠吉)·이응린(李應獜)·조유정(趙惟精)·구인경(具仁慶)·이문전(李文荃)·오정방(吳定邦)·구덕령(具德齡)·신충일(申忠一)·김윤신(金允信), 이조 참의 유희발(柳希發), 호조 참의 조유도(趙有道), 예조 참의 이명남(李命男), 병조 참의 정립(鄭岦), 참지 이원엽(李元燁), 형조 참의 정규(鄭逵), 공조 참의 장자호(張自好), 행 호군 정광성(鄭廣成)·이위경(李偉卿)·이여검(李汝儉)·윤의(尹顗)·성이문(成以文)·김영남(金穎男)·윤안국(尹安國)·황치성(黃致誠)·유대일(兪大逸)·황락(黃洛)·강담(姜紞)·이정험(李廷馦)·이식립(李植立)·전유형(全有亨)·성시헌(成時憲)·조희보(趙希輔)·박재(朴榟)·이일원(李一元)·김효신(金孝信)·김경운(金慶雲)·유민(柳旻)·안몽윤(安夢尹)·유응형(柳應泂)·박상(朴瑺) 등을 이끌고, 사인(舍人) 유충립(柳忠立)·정광경(鄭廣敬)이 당하관을 이끌고서【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어서 여기서는 대략만 거명(擧名)했다. 이때 분위기가 너무도 무시무시하여 사람들이 모두 정청(庭請)에 불참하면 꼭 죽을 줄로 알았기 때문에, 평소 명검(名檢)을 약간 지닌 자들마저 휩쓸려 따라가는 꼴을 면치 못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불참한 이들은 단지 영돈녕부사 정창연(鄭昌衍), 진원 부원군(晉原府院君) 유근(柳根), 행 판중추부사 이정귀(李廷龜),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 행 지중추부사 김상용(金尙容),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 행 부호군 이시언(李時彦), 지중추부사 신식(申湜), 진창군(晉昌君) 강인(姜絪), 청풍군(淸風君) 김권(金權),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진안위(晉安尉) 유적(柳頔), 동지돈령부사 김현성(金玄成), 복천군(福川君) 오백령(吳百齡), 행 부호군 이시발(李時發), 행 사직 김류(金瑬)·권희(權憘), 행 첨지중추부사 오윤겸(吳允謙), 행 사직 송영구(宋英耉), 행 사과 박동선(朴東善), 행 사정 정효성(鄭孝成), 이경직(李景稷)뿐이었으며, 당하관으로는 박자응(朴自凝)·강석기(姜碩期)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신의(李愼儀)와 권사공(權士恭)의 경우는 의논을 수합할 때 지극히 명백하게 진달했는 데도 결국은 그만 며칠동안 따라 참여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그리고 김지수(金地粹)는 의논드릴 때 우물쭈물했고 또 정청에 참여했으므로 역시 유배당했는데, 당시에 그를 평가하기를 ‘이쪽과 저쪽을 모두 편들면서 양쪽 어깨를 다 드러낸 채 걸어다녔다.’고 하였다. 】 아뢰기를, “역적을 토죄하는 일은 《춘추(春秋)》를 법으로 삼아야 하고, 변고에 대처할 때에는 종묘 사직을 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구차하게 사정(私情)을 따르다 보면 의리가 밝혀지지 않고, 혹시 차마 못하는 점이 있게 되면 난망(亂亡)이 필연적으로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臣子)가 오늘날 정청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생각건대 이 서궁(西宮)이 화를 길러 난을 빚어낸 것은 서적에서도 보기 드물며 고금 역사상에도 듣지 못했던 일인데, 여기에서 죄 열 가지를 들어 그 대강을 설명 드릴까 합니다.

역적 이의(李㼁)를 처음 낳았을 때 은밀히 유영경(柳永慶)으로 하여금 속히 진하(陳賀)하는 예를 드리게 하여 인심을 동요시켰고, 또 흉악한 점장이를 사주하여 지극히 귀하다고 칭찬하게 하는 한편, 날마다 요사스러운 경문(經文)을 외어 큰 복을 기원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첫번째 죄입니다. 선왕께서 건강이 좋지 못하셨을 때 자기 소생을 세우려고 꾀하여 역적 유영경과 결탁하여 안팎으로 상응하면서 언문으로 은밀히 분부를 내려 전위(傳位)하지 못하게 막았으니, 이것이 두 번째 죄입니다, 초야에서 대현(大賢)965) 이 충성을 다 바쳐 항소(抗疏)를 올리자, 이것을 기회로 감히 세자를 바꿔 세우려고 도모하여 눈물을 흘리며 선왕께 권한 나머지 여러 차례 엄한 분부를 내리시게 하고 아직 책봉(冊封)을 받지 못했다는 등의 말씀이 있도록 함으로써 듣는 이들을 크게 놀라게 하였으니, 이것이 세 번째 죄입니다. 선왕께서 승하하셨을 때 유명(遺命)이라고 사칭하고는 희건(希騫)으로 하여금 어필(御筆)을 위조하여 쓰게 한 다음, 칠흉(七兇)966) 에게 의를 부탁하여 합심해서 보호케 하고 그가 장성하기를 기다려 대위(大位)를 뺏으려고 획책하였으니, 이것이 네 번째 죄입니다. 김제남(金悌男)을 가까이 끌어들여 궁중에서 유숙(留宿)케 하고, 흉도(兇徒)와 많이 결탁하여 밤낮으로 역모를 꾀하는 한편, 궁노(宮奴)를 단속하여 은밀히 부서(部署)를 정해서 행하게 하고 양식과 군기(軍器)를 비축하여 급할 때 대비토록 하였으며, 서얼 출신들로 하여금 널리 무사를 모집케 한 다음, 야간에 훈련을 시켜 흔단을 틈타 난을 일으키려 하였으니, 이것이 다섯 번째 죄입니다.

궁중에 제단을 설치한 뒤 손바닥을 뒤집듯이 쉽사리 축문을 모아 차마 말할 수 없이 성상의 몸에 위해를 가하려 하였고, 눈먼 무당을 시켜 못할 짓 없이 저주를 행하게 하면서 닭·개·돼지·쥐 등을 잡아 궁궐 안에서 낭자하게 술수를 자행했는가 하면, 16종에 이르는 비법을 써서 기필코 계책을 이루려 하였으니, 이것이 여섯 번째 죄입니다. 선후(先后)를 눌러 이길 목적으로 능침(陵寢)을 파내고 가상(假像)을 만들었으며, 칼과 활로 흉악한 짓을 자행했는가 하면 고기 조각에 어휘(御諱)를 써서 까마귀와 솔개에게 흩어줘 먹임으로써 감히 선령(先靈)을 욕되게 하고 성상의 몸을 해치려 하였으니, 이것이 일곱 번째 죄입니다. 이경준(李耕俊)이 지은 격문은 그 말이 헤아릴 수 없었고 화살에 묶어 궁궐 담으로 던져 넣은 글은 참혹하기 그지없는데, 이 모두가 서궁에서 지어낸 것들로서 이를 외간에 전파시킨 결과 흉악한 역적의 무리들이 전후에 걸쳐 핑계를 삼고 차마 듣지 못할 사항들을 문자로 드러내게 하였으니, 이것이 여덟 번째 죄입니다. 흑문(黑門)에 글을 통하려던 서응상(徐應祥)이 붙잡혔고, 베개 속의 파자(破字)한 글의 곡절은 의일(義一)이 공초(供招)하였는데, 중국 관원에게 호소케 함으로써 상국(上國)에 화란을 부추기려 하였으니, 이것이 아홉 번째 죄입니다. 선왕께서 어질다고 여겨 택하셨고 천자가 책봉을 명하였으므로 명위(名位)가 이미 정해져 국내에서 모두 떠받들고 있었는데, 내탕금(內帑金)을 많이 내어 서양갑(徐羊甲)에게 넉넉하게 밑천을 대주면서 왜인 속으로 들여보낸 뒤 은밀히 외부의 원조를 부탁하면서 이해(利害)로 유혹하게 하였고, 또 심우영(沈友英)으로 하여금 몰래 노추(老酋)의 진영과 통하게 함으로써 그 세력에 가탁해 어린 아이를 세울 계책을 깊이 꾸미고 장차 중국 조정에 항거하려 하였으니, 이것이 열 번째 죄입니다.

그러고 보면 무씨(武氏) 967) 의 죄악들도 여기에 비하면 오히려 적고 조후(趙后) 968) 가 후계자를 없앤 것도 여기에 비하면 심한 것이 아니라 하겠습니다. 한 나라의 국모(國母)로서 행해야 할 도리를 잃은 이상, 신자(臣子)가 된 처지에서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의리만이 있을 뿐인데, 당(唐)나라 때 종묘(宗廟)에서 수죄(數罪)했던 것처럼은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한(漢)나라 때 폐출(廢出)시켰던 것은 따르기에 합당한 관전(寬典)이라 할 것이니,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종묘 사직의 큰 계책을 깊이 생각하시고 온 나라의 여론을 굽어 따르시어 화의 근본을 제거하소서. 그러면 더 이상의 다행이 없겠습니다.” 하니,【이이첨이 지은 것이다. 이첨이 한효순을 협박하여 의논을 정하게 하고는, 제학 이경전과 유몽인을 불러 한 막소(幕所)에 함께 들어가게 한 뒤 김개로 하여금 붓을 잡고 입으로 불러주는 대로 쓰게 한 것이었다. 이는 대개 이첨과 허균·김개가 오래 전부터 밖에서 구상해 온 것이었다. 】 답하기를, “내가 덕이 없는 사람으로서 운명까지 기구하여 무신년과 계축년의 변고가 모두 천륜(天倫)에서 나왔으니, 이 어찌 상정(常情)으로 볼 때 참아 넘길 수 있는 일이었겠는가. 그러나 종묘사직이 중한 탓으로 애써 정신(廷臣)의 요청을 따르긴 했다마는 날이 가면 갈수록 애타고 아픈 마음이 깊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또 이런 논을 듣게 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하늘이여, 하늘이여. 나에게 무슨 죄가 있기에 어쩌면 이다지도 한결같이 혹독한 형벌을 내린단 말인가. 차라리 신발을 벗어 버리듯 인간 세상을 벗어나 팔을 내저으며 멀리 떠나서 해변 가에나 가서 살며 여생을 마치고 싶다. 나의 진심을 살펴 연민의 정을 가지고 다시는 이런 말을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폐모론을 시종일관 주장하면서 화란을 빚어내게 된 원인이 이이첨이 앞장서서 음모를 꾸민 데에 연유한 것이지만 그 당시 대신과 중신들이 만약 죽을힘을 다해 극력 쟁집하면서 확고한 태도를 견지하여 따르지 않았다면 필시 그 흉모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기자헌(奇自獻)과 이항복(李恒福) 등이 유배된 뒤로는 온 조정이 조용히 침묵만 지킬 뿐 한 사람도 의기를 떨쳐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은 한효순이 우상의 신분으로서 이이첨에게 내몰려 부림을 받은 나머지 앞장서서 백관을 인솔하고 나가 머리를 나란히 하고 정청(庭請)하는 일을 따름으로써 인륜을 파괴하는 일로 혼주(昏主)를 인도하고 말았으니, 그야말로 개벽 이후로 겪는 일대 변고였다고 할 것이다. 저 흉악한 역당(逆黨)이야 원래 말할 가치도 없지마는, 효순이 지레 악으로 유도한 죄는 과연 주벌(誅罰)하더라도 용서받기 어려운 것이다. ]】

 <정청 후>

○ 광해 123권, 10년(1618 무오 / 명 만력(萬曆) 46년) 1월 16일(병자)10번째기사
   우의정 한효순이 2품 이상을 이끌고 기준격·허균을 조사해 처치하기를 청하다

[우의정 한효순이 2품 이상을 이끌고 아뢰기를, “전날 대간이 합계(合啓)한 바, 기준격(奇俊格)이 상변(上變)한 일과 허균이 스스로 해명하며 상소한 것이야말로 모두 국가에 막중한 일인 만큼 끝내 덮어 둘 수가 없는데, 이렇듯 대론이 바야흐로 치열해져 백관이 정청(庭請)하는 날을 당해서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다른 일은 돌아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방금 관유(館儒)가 바친 흉서 때문에 이미 정국을 행하였으니, 전일 대간이 아뢴 대로 기준격과 허균을 똑같이 조사해 처치토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아서 적당히 처리할 것이다. 어째서 꼭 번거롭게 아뢰는가.”하였다.]

○ 광해 123권, 10년(1618 무오 / 명 만력(萬曆) 46년) 1월 18일(무인) 8번째기사
   우의정 한효순이 차자를 올려 양사의 인피로 삭직해주기를 청하다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전일 2품 이상의 관원이 계사(啓辭)를 올린 것은 실로 여러 재신(宰臣)들과 뭇 사람들의 의논에서 나온 것으로서, 감히 그것을 대론보다 중시해서가 아니었고 대론에 우선하여 계청드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원궤의 흉서 사건을 지금 추문(推問)하고 있는 중이니 기준격과 허균 두 사람을 아울러 국문하는 일도 불가할 것이 없으므로 그저 하정(下情)을 진달 드린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을 처리할 즈음에 제대로 살펴 처리하지 못한 나머지 양사가 인피하게 만들었으니, 속히 신의 삭직(削職)을 명하시고 새 정승을 뽑아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모두 잘 알았다.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 광해 124권, 10년(1618 무오 / 명 만력(萬曆) 46년) 2월 11일(신축) 2번째기사
   유학 정주한 등이 상소하여 좌상 한효순을 논척하다  
○ 광해 127권, 10년(1618 무오 / 명 만력(萬曆) 46년) 윤4월 6일(갑자)3번째기사
   풍기의 진사 곽영이 이이첨·허균 등을 논핵하는 상소문  
○ 광해 127권, 10년(1618 무오 / 명 만력(萬曆) 46년)윤4월 26일(갑신)5번째기사
   유학 송영서가 상소하여 한효순·강린의 죄를 징계하고 서궁의 폐출을 청하다  
○ 광해 127권, 10년(1618 무오 / 명 만력(萬曆) 46년)윤4월 29일(정해)8번째기사
   관학 유생 정희립 등이 한효순에게 주벌을 가하고 삼사를 다스리기를 청하다  
○ 광해 129권, 10년(1618 무오 / 명 만력(萬曆) 46년) 6월 4일(신유) 4번째기사
   합사 연계하여 서궁 폐출 절목을 속히 내리고 좌의정 한효순을 논죄하기를 청하다

합사하여 연계하기를, “〈신들이〉 어제 삼가 성상의 비답을 받들건대, 이미 유시하였다고 분부하셨으므로 신들은 안타깝고 답답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들이 궐문에 엎드려 합사의 형식으로 그칠 줄 모르고 잇달아 소장을 올려 호소하면서 기대한 것이 어찌 이미 유시하였다[已諭]는 두 글자에 있겠습니까. 서궁의 대변(大變)이야말로 예전에 없었던 일로서 오늘날 신민들은 의리상 같은 하늘 아래에 살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이미 진달 드린 논이라고 하여 차마 중단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보다 더 급하게 처리할 일이 없고 보면 절목을 내리는 일을 어찌 잠시라도 늦춰서야 되겠습니까. 화의 근본이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에서 변방 사태마저 급해지고 있으므로 불안한 분위기가 더욱 조성되고 인심이 갈수록 두려워하고 있으니 하루가 급하게 대론을 마무리 지어야 할 것입니다. 속히 절목을 내리시어 묘당으로 하여금 미진한 사항을 보충해 정하게 하고 차례차례 거행하게 함으로써 폐출하는 형전을 완결 짓도록 하소서. 전 좌의정 한효순은 본래 견해를 달리했던 사람인데 지난번 인재가 부족했던 탓으로 정승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당초 대론이 일어났을 때 머뭇거리며 관망만 한 채 거취를 결정하지 않았는데 공의가 격발되자 어쩔 수 없이 일어나긴 했으나 본래 성의가 없어 겨우 책임만 때웠을 따름입니다. 그러다가 지금까지 절목이 내려지지 않고 대론이 마무리되지 않자 사람들의 겁주는 말을 듣고는 별안간 정고를 함으로써 다른 논을 펼치는 자들의 기를 북돋아주고 이 일을 추진하는 이들을 외롭고 위태롭게 만들었으니, 대신의 도리가 과연 이런 것이란 말입니까. 더구나 지금은 변방의 사태가 몹시 급해져 인심이 흉흉해지고 있는 만큼 대신이 물러가기를 청할 때가 아닌데 여러 차례 돈유했음에도 끄떡도 하지 않았으니 효순의 죄가 이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 하겠습니다. 유배 보내도록 명하심으로써 일에 임해 교묘하게 피한 죄를 징계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우선 처치를 기다리고 번잡스럽게 소란을 떨지 말라. 한효순의 일도 그렇다. 고관 대작으로서 서궁을 비호한 자가 효순 한 사람만이 아닌데, 그렇다면 일일이 죄를 주어야 하는가. 더구나 이미 체차시켰으니 그만 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자료수집]
[조선왕조실록]

 <속잡록  정사년 만력 45년, 광해군 10년(1617년)>      
                                                          조경남 [趙慶男, 1570 ~ 1641]    

○ 유학(幼學) 이형(李泂)이 상소하기를, “아뢰옵나이다. 신은 태어나서 성세(聖世)를 만났고, 맑은 교화에 은혜를 입었으므로 털끝만큼의 보답이라도 없을 수가 없습니다. 또 종묘와 사직의 안위에 관계됨이 있는데도 조정에 감히 말하는 자가 없는 것을 생각하니, 그 책임은 마땅히 초야에 있는데 어찌 그 직분에 넘친다고 해서 말도 없이 임금을 등질 수 있겠습니까? 신이 요즈음 상소한 유생 윤선도(尹善道)의 일을 가지고, 전하를 위하여 대략 그 줄거리를 아뢰겠습니다.

예조 판서 이이첨이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희롱하는 모양은 이미 윤선도의 상소에 남김없이 말하였으니 신은 감히 다시 번거롭게 하지 않겠으나, 다만 이이첨의 권세는 한 나라를 기울게 하고, 세력은 임금을 핍박하는 것을 길 가는 사람들도 눈을 흘기는데,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윤선도는 일개 서생으로서 종묘와 사직의 위태함을 직접 보고 감히 피가 뚝뚝 드는 소를 올렸으니, 혈기가 있다고 하는 자는 모두 놀라서 뛰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모두 성상을 우러러 결단을 내리시기를 바라는 것은, 이이첨이라고 하는 자는 마땅히 자리를 깔고 엎드리어 죄를 기다릴 겨를도 없을 것이요, 그의 심복이라고 하는 자들도 또한 의당 두려워할 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이첨은 조금도 반성하여 삼가는 일도 없고 더욱 흉악한 불꽃을 피울 뿐이요, 삼사와 정원의 관원과 반궁(泮宮)과 사학(四學)의 유생에 이르러서는 다만 이이첨이 있는 것만을 알 뿐 임금이 계시다는 것은 모르며, 눈을 부릅뜨고 옷깃을 걷어붙이고 없는 일을 만들어 내고, 반드시 윤선도를 죽을 지경에 빠뜨리려고 하여 급급하기가 오히려 혹시 뒤지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니, 그 마음이 있는 곳은 길 가는 사람도 알고 있습니다.

도승지 한찬남(韓纘男)이란 자는 그 부자가 모두 학문이 없는데도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사람들의 말이 떠들썩합니다. 게다가 그의 한 아들이 지난해의 식년시에 등과하였으니, 이른바 자표(字標)로써 서로 주고받는 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무리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더욱 마땅히 두려워하고 물러나야 하거늘 꼼짝도 아니하면서 그대로 관직에 있으면서 자기들의 마음대로 하여, 전하의 비답이 아직 내리기도 전에 감히 흉악하고 참혹한 계(啓)를 올려 위로는 임금의 마음을 떠보고, 아래로는 깃발을 세울 땅을 만들려고 합니다. 옛날 우리 선왕께서, ‘다른 날 조정에 서면 그 마음 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신 가르치심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증험되었습니다. 아! 오늘날의 정원과 삼사는 전하의 정원과 삼사가 아니오라, 이이첨의 정원과 삼사이오며, 오늘날의 반궁과 사학은 전하의 반궁과 사학이 아니오라, 이이첨의 반궁과 사학이니, 윤선도가 말한, ‘이제는 이미 덩굴이 뻗어나갔다.’ 한 것이 또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이들을 도모하는 것이 빠르지 않으면 세력은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생각이 이에 미치니 춥지도 않은데 떨려 옵니다.

그들이 선도를 무함하는 방법은 그 말들이 비록 많으나 그 요점은 세 가지이니, 곧 역적을 옹호한다는 것, 품행이 더럽다는 것,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았다는 것등입니다. 역적을 옹호한다는 것은 바로 반역이니 어찌 나라를 근심하여 집안을 잊고, 임금을 사랑하여 몸을 잊는 윤선도와 같은 이가 하는 일이겠습니까. 장식(張軾)의 말에, ‘임금의 뜻을 거슬려가며 감히 간언하는 가운데에서 절의(節義)에 죽는 신하를 찾는다.’ 하였는데, 윤선도가 위엄을 무릅쓰고 권세 있는 간신을 감히 말하였으니, 임금의 뜻을 거슬려가며 감히 간한다는 것이 이보다 나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역적을 옹호하는 것이 어찌 이 사람이 하고자 하는 일이겠습니까? 그들이 말한, ‘역적의 무리에서 큰 공을 세웠다.’ 한 것이나, 이른바, ‘유영경(柳永慶)에게 보답할 터를 만들고, 김제남의 옥사(獄事)를 뒤집을 계략을 꾸몄다.’ 한 것은, 성상의 총명을 어지럽혀서 반드시 말하는 자들을 불측(不測)한 곳에 처치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극히 흉악하고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도 없고 차마 말할 수도 없습니다. 하늘이 위에서 내려다보고 귀신이 옆에서 증거 하지 않으셔도, 임금께서는 이미 통촉하셨으리라 생각되어 많이 변론하지는 않겠습니다. 이전방(李傳芳)이 상소의 속에 엮어 넣은 바와 삼사가 계차(啓箚)에 만들어 넣은 바와 윤선도 부자의 악행이 모두 하늘과 땅에 사무치는 죄입니다. 또 ‘나라의 언론이 떠들썩하다.’ 한 것은 이 사람에게 참으로 이러한 행동이 있어서 나라의 언론이 떠들썩하다면 유적(儒籍)에서 깎아버릴 수도 있으며, 과거를 못 보게 할 수도 있으며, 풍문(風聞)으로 고증해 볼 수도 있으며, 삼성(三省)에서 교대로 국문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당의 우두머리가 나라의 정권을 천단하여 잡고 있고, 그들 당의 무리들이 형조(刑曹)에 깔려 있는데도 일찍이 윤선도 부자의 악행을 말하지도 않다가 이제 비로소 말들을 하는 것은 전하께옵서 궁중 속에 깊이 계시어 비록 바깥의 일을 모르실지라도 이것을 가지고 생각해 보시면 그것이 무망(誣罔)하다는 것을 밝게 아시고 의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

윤선도가 권세를 가진 간신을 극언(極言)할 때에는 어찌 엄청난 화가 곧 이르리라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사생(死生)이란 역시 커다란 문제인데, 그가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고 죽는 지경에 나아가려고 하였겠습니까? 하물며 그들이 이른바 아비의 권고라 하는 것은 결단코 이러할 리가 없는 것이니 변설(辨說)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의 말은 발분하여 늠름하고 힘에 차 있으니 반드시 남의 말을 듣고 억지고 지은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남의 사주를 받지 않았다는 것도 역시 분명한 일입니다. 아! 이이첨을 칭찬하고, 이이첨에 아첨하는 소(疏)들은 어찌 남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이이첨의 간사스러운 점을 말한 소만을 홀로 남의 사주를 받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얽어서 일망타진하려는 계략이 분명합니다. 유왕(幽王)과 여왕(厲王) 이대(二代)의 이야기에 관하여는 경방(京房)이 옛날 일을 끌어다가 당시의 일에 인용하였는데, 대강 대강 의논한 것이니 당시의 임금에만 적절할 뿐만이 아니고, 그 말은 심각하고 절실하고 명백하여 임금에게 여쭙는 데에 가장 합당하므로 진덕수는 이것을 《대학연의(大學衍義)》에 실어서 임금에게 올렸던 것입니다. 신하로서 진덕수와 같이 임금을 공경할 수 있다면 또한 옳은 일이니, 이것이 과연 잊을 수 있는 말이겠습니까? 윤선도가 무고를 받은 것은 신이 마땅히 따져서 밝힐 것은 아니오나, 이 일을 따져서 밝힌 후에는 삼사와 정원과 관학(館學)이 이이첨과 죄악을 같이하여 말하는 자를 얽어 빠뜨리려는 뜻이 드러날 것이며, 이것을 밝힌 후에는 이이첨의 도당이 많은 것과 세력이 두려울 정도라는 것과 나라의 위급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감히 그 한둘을 아뢰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 옛날 융성했을 때는 간하는 자를 상을 주어 언로를 열었어도 감히 아뢰는 자는 오히려 얻기 쉽지 않았는데, 하물며 말하는 자를 무거운 형벌로 처치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습니까? 말하는 자를 무거운 형벌로 다스리는 것도 오히려 옳지 않은데 하물며 말하는 자의 부형을 죄로 다스리는 일이 옳다고 하겠습니까? 세상에는 자기의 몸을 돌보지 않으면서 감히 말하는 것은 본래부터 드문 일인데, 어찌 자기의 어버이가 큰 화를 입는 것을 돌보지 않으면서 감히 말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도 소인들이 언로를 막는 술책으로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로부터 직언하여 임금에게 꺼림을 당하여 죄를 쓴 사람은 있었으나 그래도 연좌(緣坐)의 형벌은 없었는데, 이제 윤선도는 이이첨에게 장차 연좌의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옛사람의 말에, ‘임금의 허물을 말하는 것은 쉬우나, 권세를 지닌 신하의 과실을 말하기는 어렵다.’ 하는 말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삼사와 정원과 관학에서 이이첨을 대우하는 것이 임금을 대우하는 것보다 지나치다고 하겠으며, 이이첨은 그 권세가 임금을 기울게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어찌 권세가 임금을 기울게 함이 이와 같이 극하면서 국가가 위태롭지 않았던 때가 있겠습니까?

신의 걱정과 염려가 여기에 미치게 되자, 의분과 한탄과 근심과 두려움이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여 한 자의 상소문을 가지고 대궐에 우러러 외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이첨은 다른 사람을 통하여 얻어 듣고, 그가 친하게 지내는 박안겸(朴安謙)을 시켜 신의 처 사촌 대부(妻四寸大父) 노직(盧稷)에게 말을 전하기를, ‘그대가 이형(李泂)의 상소를 멈추게 하지 못하겠는가? 실제로 중지시켜 보라.’ 하였으며, 또 한림 서국정(徐國禎)이 신의 처 오촌 숙모의 남편 이극양(李克讓)을 와서 보고 말하기를, ‘그대가 이형의 상소를 멈추게 할 수 없는가? 이형이 만약 멈추지 않으면 반드시 무거운 화를 당하리라.’ 하고, 또, ‘그대는 왜 벼슬을 구하지 않는가? 내가 마땅히 그대를 위해 예조 판서에게 힘써 주리라.’ 하였습니다. 이이첨이 이미 삼사를 사주하여 말하는 자를 다스리고, 또 친한 사람을 시켜 말하는 자를 겁을 주어 멈추도록 하려 하니, 어찌 그가 언로를 막으려는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겠습니까? 우의정 한효순이 의논을 거두어들이라는 명령을 따라 언로의 중대함을 대략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 씀씀이가 또한 매우 애처로운데도 삼사가 헐뜯고 물리쳐서 조금도 너그럽게 용서하지 않으므로, 수상(首相)은 병을 핑계 삼아 감히 의논을 제출하지 않고 원임(原任)들은 문을 닫고 감히 입을 열지 못한 것입니다. 이이첨의 권세가 어떠하옵니까? 이이첨의 무리는 이이첨이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희롱하고 과거 시험장에서 사사로움을 행사하는 일은 따져서 밝히지는 못하면서, 언제나 효성하고 우애 있으며, 청렴결백하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역적을 토벌한다고 하니 신은 간절히 괴이하게 여겼습니다. 효(孝)란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서 비롯하여 임금을 섬기는 데에서 끝나는 것인데, 그가 임금을 섬기는 것이 이와 같은데도 효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청렴이란 권세를 탐하지도 즐기지도 않는 것인데, 그가 천단하는 것이 이와 같은데도 청렴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또 한 가지 얘기가 있습니다. 가령 그에게 참으로 효행이 있다면 어찌 뒷날이 없겠습니까? 그런데도 그의 몸이 죽기도 전에 먼저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벼슬자리는 종백(宗伯 예조 판서)에 있으면서 또 자기의 행장을 지어내니 효성 있는 자가 과연 이런 것입니까? 그의 네 아들은 문명(文名)이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연이어 과거에 장원을 하였고, 집안이 대대로 본래부터 가난한데도 갑제(甲第)에 대마루가 연이었으니, 청렴한 자가 과연 이런 것입니까? 하물며 역적을 토벌한다는 것은 곧 천지의 떳떳한 법이요, 신하의 대의(大義)입니다. 신하된 자 누가 정성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유영경(柳永慶) 이래의 여러 역적이 반역을 꾀한 죄는 사람마다 잡아서 이들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요, 본래부터 그들만이 토벌할 것을 청한 일이 아닌데도 하늘의 공을 탐내어 자기의 힘으로 삼으려 합니다. 또 ‘역적을 옹호한다.[護逆]’고 하는 두 글자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함몰시키려는 기회와 함정으로 여기니, 그가 겉으로는 나라를 위한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자기와 다른 사람을 물리치는 것을 꾀하니 교묘하고도 참혹하다고 하겠습니다. 신경희(申景禧)가 반역을 하려고 음모한 죄상은 소명국(蘇鳴國)의 자백 속에 다 드러났고, 대변(對辯)할 때에 여러 차례 다하였으니, 그가 반역을 꾀하였다는 것은 여러 역적과 다름이 없건마는 이이첨은 옹호하려 하고, 삼사는 입을 다물고 침묵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이첨과 신경희가 평소부터 매우 교제가 친밀하였고, 그의 아들이 또한 역적의 자백 속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한결같은 마음으로 역적을 토벌한다는 것이 과연 이런 것입니까? 이이첨의 무리들은 또 이이첨에게 계책을 결정하여 사직을 호위한 공적이 있다고 해서 자랑합니다만, 예로부터 왕실에 큰 공이 있으면서 끝내는 왕실에 이롭지 못했던 사람이 없었단 말입니까? 이는 깊이 믿을 것이 못 되는 것입니다.

아! 윤선도가 권세를 가진 간신을 비평한 이래로 간사한 무리들은 죽음으로써 맹세하고 벌떼처럼 왱왱거리며 일어나서 꾸미어 모함하는 참혹함이 저와 같이 극심하였으나, 다행히도 성감(聖鑑)이 매우 밝은 덕분으로 아직 그들이 흉계를 멋대로 하지 못하니, 중외(中外)의 사람들은 모두 ‘전하께서 이미 이이첨의 죄를 아시고 계시다.’라고 생각하고, 온통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하고, 서로 고하기를, ‘우리나라도 바람직하다.’ 합니다. 그러나 신의 걱정과 두려움은 또한 지난날보다도 더 심한 바가 있으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예로부터 권세를 가진 간신은 만약 임금이 자기의 정상을 알고 계신 것을 알게 되면, 죽음 속에서 목숨을 꾀하게 되어 그 극단 한 수단을 쓰지 않는 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임금께서 이미 그들의 말을 좇아서 윤선도를 죄주지 않는다면, 간사한 무리들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신의 걱정과 두려움이 지난날보다도 더 심한 바가 있는 것은 이것 때문입니다. 신은 본래부터 간사한 무리가 모함하여 몸이 반드시 윤선도와 같이 될 것을 알고는 있으나, 말씀을 드려 여기까지 이르고 꺼리는 것이 없는 것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이 스스로 멎지 않는 것을 이기지 못하고, 또 임금께서 위에 계시다는 데에 믿음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임금께서는 어리석은 신하의 간절한 정성을 굽어 살피시고 윤선도의 충성스러운 말을 통촉하시어, 급히 이이첨이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희롱한 죄를 다스리시고, 또 삼사와 정원과 관학이 당을 이루어 나쁜 것을 같이 하고, 임금을 속인 죄를 다스리시어, 종묘와 사직이 억만년 끝이 없이 아름답게 하십시오. [소가 들어가자 함경도로 귀양을 갔다가 무오년에 광양(光陽)으로 이배(移配)되었고, 계해년 3월에 용서를 받았다.]

 [자료수집]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속잡록(續雜錄)]
 [續雜錄一 정사년 만력 45년, 광해군 10년(16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