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준겸(韓 俊謙)이 쓴 유항선생(柳巷先生)문경공(諱 脩)문집 발문     

유항집(柳巷集) 발문(跋文)에 말했다. 유항집(柳巷集)은 같은 문하(門下)인 관찰사(觀察使)성공(成公)이 처음 금산군(錦山郡)에서 간행(刊行)한 것인데, 자획이(字劃) 너무 잘아서 보는 자가 어렵게 여기드니 임진(壬辰) 난리에 다타없어져서 이 문집(文集) 이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몹시 적었다. 기해 년간(己亥 年間)에 우리 숙부(叔父) 지금 함경백(咸境伯)으로 있는 효순공(孝純公)이 호남관찰사(湖南觀察使)로 나갔다가 우연히 한질(帙) 얻어서 널리 펴려고 생각하였는데, 이때 준겸(俊謙)이 마침 영남(嶺南) 의 안찰사(按察使)로 있었다. 이에 숙부(叔父)께서 원본(原本)을 보내어 나로 하여금 교정(校正)을 보게하여 두 번째 간행(刊行)을 계획했다.

준겸(俊謙)은 선조(先祖)의 유고(遺稿)를 소중히 여기고 숙부(叔父)의 지극한 의리에 감동하여 삼가 받아서 일을 맞추어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빠진 것을 보충하여 고쳐 쓰는 일이 이제 끝나고 아직 출판(出版)에 들어가기 전에 파면되어 돌아오게 되었다. 그 후 금년 봄에 또 호남(湖南)의 명령을 받아  완산(完山 ; 全州)에 머물러 있게 되자 비로소 장인(匠人)을 얻어 역사(役事)를 마쳤는데 자체(字體)와 글씨 모양이 구본(舊本) 보다는 자못 나은 것 같다. 이에 드디어 본부(本府)에 간수해 두고 오래오래 전하게 했다.

여기에서 간절히 엎드려 생각하건데 우리선조의 문장과 학행(學行)은 분명히 역사에 실려 있어서 잘 쓰는 글씨와 뛰어난 문장이 금석(金石)같이 빛나고 있으니, 이 문장은 어른의 말씀이 나머지를 수습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그 행하신 일의 여부(與否)는 이 두어 가지 일에 힘입을 것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고려 말년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 사이에 선조(先組)의 문생(門生)과 후예(後裔)가 알 수 없는데, 처음에 일을 제창(提唱)한 자는 성공(成公)이였고, 중간에 계속한 것은 숙부(叔父)요, 끝으로 이룬 자는 준겸(俊謙)인데, 마침 이 세 사람이 호남(湖南)에 관찰사(觀察使)로 왔을 때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문집이 간행(刊行) 되는 것도 또한 기회(機會)가 있고, 선조(先祖)의 영혼이 반드시 또 명명(冥冥)한 속에 서 묵묵히 도우시는 것이니, 아아 이상한 일이로다.

만력(萬曆) 기원(紀元) 임인(壬寅) 팔월(八月) 상정(上丁)에 팔대손(八代孫)가선대부(嘉善大夫) 전라도 관찰사(全羅道 觀察使) 겸(兼) 순찰사(巡察使) 병마수근 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 전주부윤(全州府尹) 준겸(俊謙) 삼사 씀. 공의 필법(筆法)은 남에게 뛰어났는데, 그의 필적(筆跡)이 새겨진 것으로는 개성(開城)의 노국대장공주묘비(魯國大長公主墓碑), 양주(楊洲)의 천보산 회암사(天寶山檜岩寺), 여주(驪州)의 봉미산(鳳尾山) 신륵사나옹 석종기(神勒寺懶翁石鐘紀) ,영월(寧越)의 묘향산(妙香山) 안심사(安心寺) 사리탑비(舍利塔碑)인데 이색(李穡)이 지은 글이다. (淸州邑誌 抄)   

 [자료수집]
 [청주한씨 문간공(淸州韓氏 文簡公) <제11호 종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