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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감사(韓孝純)가 적장에게 보낸 답신[慶尙監司答賊將書]          

1) <한국고전번역원> 자료

   아직 늦지 않았으니                2011. 4. 14. (목)

지나간 잘못이야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의 일은 만회하기에 늦지 않았다.

東隅之逝, 雖不可追, 而桑楡之失, 補之非晩。
동우지서, 수불가추, 이상유지실, 보지비만。

- <경상감사가 적장에게 보낸 답신[慶尙監司答賊將書]>
《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27년(1594) 8월 30일조

[해설]

위 글은 임진왜란 무렵 경상감사[한효순(韓孝純)으로 추정됨]가 일본 대마주(對馬州) 태수 풍신의지(豊臣義智)에게 보낸 답신에 나오는 말입니다. 한반도를 초토화시킨 대전란은 일단락되었지만 아직 전운이 감돌던 당시, 중국이 나서서 양국의 화친을 추진하던 중이었습니다. 풍신의지가 보내온 편지 내용은 전란의 책임을 일본 본토와 우리나라에 전가하기에 급급하고, 구구절절 자신들의 무죄를 변명하여, 오직 차후의 불이익을 모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경상감사는 질책을 최대한 자제하고 시종 회유하는 말로 일관하다가, 위의 구절로써 일침을 놓고 글을 맺었습니다.

처음의 실수를 나중에 만회하는 것을 ‘상유지수(桑楡之收)’라고 합니다. 이는 중국 동한(東漢) 때 풍이(馮異)가 적미(赤眉) 군사를 효산(崤山) 아래에서 대파하자 광무제(光武帝)가 치하하는 글을 내리기를 “동우에서는 잃었지만 상유에서 거두었다고 할만하다.[可謂失之東隅 收之桑楡]” 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합니다.

동우(東隅)는 동쪽 모퉁이로 해가 뜨는 곳이고, 상유(桑楡)는 뽕나무와 느릅나무로 이들 나무 끝에 서쪽 해가 남아 있다고 하여 해가 지는 곳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동우와 상유는 일로는 처음과 끝이 되고 인생으로는 초년과 노년이 되므로, 옛사람의 글에 다양한 의미로 많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이번 일본 동북대지진과 원전의 재해는 전 세계를 비통과 공포에 몰아넣었습니다. 물론 재해의 원인을 깊이 살피고 장차 발생할 재난을 대비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과제입니다만, 당사자인 일본은 과학 연구 성과도 경제력도 세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만큼, 자국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반드시 ‘상유지수’를 얻기를 기대해봅니다.

글쓴이
오세옥(한국고전번역원)


2) 선조실록(宣祖實錄) 자료

<적장에게서 온 서신 {풍신의지(豊臣義智)}>

○ 선조 54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8월 27일(임신) 3번째기사
경상도 관찰사 한효순이 평의지 등의 서신을 치계하여 보내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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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관찰사 한효순(韓孝純)이 치계(馳啓)하기를, “평의지(平義智)와 평조신(平調信)이 화친을 청하는 서신을 방어사 김응서가 보내 왔습니다. 신이 그 문자를 보니 왜적의 서신이 틀림없었습니다. 평의지의 서신 한통과 평조신의 서신 한 통을 같이 봉해서 올려 보냅니다. 그 답서는 신이 감히 자의로 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그 서신에 이르기를, “일본 대마주 태수 풍신의지(豊臣義智)는 삼가 조선국 경상도 관찰사 대인 합하에게 아룁니다. 제가 귀국에게 단심(丹心)의 뜻을 다하여 자세히 전달하니 저의 말이 만약 귀하의 생각에 맞거든 한 사신을 보내서 면대하여 심사를 개진할 수 있게 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미리 이러한 화란이 있을 것을 알고 이에 앞서 기축년2591) 에 우리 태합 전하(太閤殿下)에게 하소연해서 사명을 받들어 자주 통신사를 청했으며 비록 조정의 의논이 분분하다 해도 굳이 이 심사를 설파했었습니다. 그 다음해 경인년에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허성(許筬) 세 사신이 일본에 왔고, 그 다음해 신묘년에 우리 전하가 석선소(釋仙巢)와 풍신조신(豊臣調信)을 보내어 세 사신을 호송할 때 선소가 짤막한 서신을 선위사(宣慰使) 오공(吳公)에게 바치면서 이러한 화란이 있을 것이라 했고, 그 후 세 사신이 잔치를 베풀던 날에도 선소가 또 이러한 화란을 예고했으며, 오공이 병 때문에 심공(沈公)이 대신 오던 날에도 선소가 또 짤막한 서신으로 이러한 화란이 있을 것이라 했는데도 조정에서는 끝내 이러한 일이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저는 차마 듣고만 있을 수 없어 몸소 부산에 가서 짤막한 서신을 부산 첨사와 동래부사 두 영공(令公)에게 바쳤는데 어떻게 주달했는지 서신마저 되돌려 보냈으니 이것이 무슨 죄입니까. 그러나 여러 해를 좋게 지내던 터이라 가슴 속에 원한은 품지 않았었습니다. 또 그 다음해 임진년에 전하에게 하소연해서 선봉인 소서행장(小西行長)을 재촉하게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귀국이 만약 선봉에게 알릴 일이 있다면 저는 그 매개(媒介)가 되려 함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부산과 동래에도 또한 짧은 편지를 보냈는데 영공들이 받지 않아 전쟁이 일어났습니다만 감히 태만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상주(尙州)에서 일전(一戰)이 있을 때 통역관 경응순(景應舜)을 사로잡아 강화(講和)를 보고하라고 했는데 끝내 그 회답도 받지 못했고 대왕(大王)께서 서울을 피하여 평양으로 가셨던 것입니다. 또 선소와 죽계(竹溪)·조신(調信) 등을 시켜 이 판서와【이덕형(李德馨)이다. 】 대동강 배[舟中]에서 만나 강화하는 것이 좋겠다고 고했는데도 이 판서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과연 나라를 망치지 않았습니까.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대군 및 배종하던 신하들이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손에 들어가자 서울에 있던 두 대군이 은밀히 저에게 서신을 보내어, ‘만약 대명(大明)이 청정을 배제하고 다른 사람을 시켜 강화한다면 청정이 두 대군을 죽일 수도 있다고 하는데 이 말이 과연 맞는가?’ 하기에, 제가 글을 만들어 답하기를 ‘청정이 영안도(永安道)에서 두 대군을 사로잡고 전하에게 아뢰었으니 지금 전하의 명령을 듣지 않고 감히 사사로이 두 대군을 죽이겠는가. 귀하는 마음을 편히 갖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른 날에 반드시 전하에게 아뢰어 청정의 손에서 빼내어 두 대군을 저의 병영에 맞아들여 은밀하게 보내드리도록 하겠다.’ 하였는데, 제가 이 약속을 어기지 않고 드디어 부산의 병영으로 맞아 와서 서일관(徐一貫)·사용재(謝用梓) 두 중국 사신을 따라 보내드린 것은 두 대군이 잘 아는 바입니다. 누가 허탄한 말이라 하겠습니까.

지금 일본이 옛날에 조공하던 길을 열어달라고 명나라에 요구하고 있고 심 유격(沈遊擊)과 고 노야(顧老爺)가 이 일을 주장하고 있는데 귀국은 오늘에 이르도록 어찌 한번 도 서신을 주지 않습니까. 만약 다년간 동쪽의 울타리가 되어온 공로를 잊지 않았다면 바라건대 귀하의 의사를 보여주시고 강화할 수 있도록 전하에게 갖추어 아뢰어 주소서. 예로부터 난리 후에는 나라가 폐허가 되고 백성이 굶주리는 법인데 어느 나라인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귀국이 만약 옛 국교를 닦는다면 포(浦)마다 있는 왜병 또한 철수할 것입니다. 제가 전하에게 포에 있는 왜 영의 양식으로 백성들의 굶주림을 구제하도록 아뢰는 바인데, 어떻겠습니까? 나머지는 사신에게 전하겠기에 낱낱이 진술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22책 336면
【분류】 *군사-통신(通信) / *외교-왜(倭)
[註 2591]기축년 : 1589 선조 22년. ☞  

(원문)

○ 慶尙道觀察使韓孝純馳啓曰: “平義智、平調信, 皆有請和之書, 自防禦使金應瑞處來到。 臣見其文字, 爲倭書無疑。 平義智書一封, 平調信書一封, 同封上送。 其答書, 則臣不敢以己意爲之” 云。 其書曰: “日本對馬州太守豐臣義智, 謹啓朝鮮國慶尙道觀察使大人閤下。 僕於貴國, 盡丹心之旨, 細陳以達。 僕之言, 若適貴懷, 請差一使, 要有面陳心事。 僕預知有此禍, 先是己丑, 訴吾大閤殿下, 奉使命頻請通信使。 雖云朝議紛紛, 强說心事, 而翌年庚寅, 黃、金、許三使到日本, 其翌年辛卯, 吾殿下差釋仙巢及豐臣調信, 護送三使, 仙巢呈短書於宣慰使吳公, 說有此禍, 而後三使設宴之日, 仙巢又告此禍。 吳公以病, 沈公代來之日, 仙巢又以短書, 告有此禍, 朝廷遂不信此事。 僕不忍聞之, 躬自赴釜山, 捧短書, 釜山、東萊兩令公如何奏乎, 短書亦卷還之, 蓋是何罪乎? 雖然, 以累年之好, 不揷恨於胸次。 又翌年壬辰, 訴殿下, 請促先鋒行長者, 是無他, 貴國若有可報先鋒之事, 僕所以爲其媒介也。 因玆於釜山及東萊, 亦雖呈短書, 令公不受之, 徒作兵馬之塵, 不敢怠慢也。 尙州一戰之日, 擒譯官景應舜, 俾報講和, 遂不見其回章, 而大王逃京, 去到平壤。 又以仙巢、竹溪、調信等, 會李判書【德馨也。】於大同江舟中, 告講和好, 判書不信之, 嗚呼! 果爲亡國。 臨海順和二君及陪臣等, 落淸正之手, 而在京之二君, 密通書于僕曰: ‘若大明除淸正, 別俾他人講和, 淸正可戮二君’ 云。 此言果然也否? 僕裁書答曰: ‘淸正於永安道, 擒二君, 奏之殿下, 今不聞殿下之命, 敢有私戮二君乎? 伏乞安貴懷可也。 他日必奏殿下, 脫淸正之手, 奉迎二君於僕營, 再慇懃送還者, 必矣。’ 僕不違此約, 遂奉迎釜山之營, 從徐、謝二天使以送還之, 二君所能知也。 孰謂之虛誕乎? 今也, 日本要開舊貢路於大明, 沈遊擊及顧老爺, 主持此事, 貴國至今日何不通一信乎? 若不忘多年東藩之功, 伏乞示貴意, 具奏殿下, 可講和者也。 古來亂後國虛、民飢, 何國不然? 貴國若修舊交, 浦浦倭兵亦撤去。 僕訴殿下, 以在浦倭營之糧物, 救人民之飢, 如何? 餘付使舌, 故不能縷陳。”

<적장에게 보낸 답신 {한효순(韓孝純)}>

○  선조 54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8월 30일(을해) 4번째기사
경상 감사가 적장에게 보낸 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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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 감사가 적장에게 한 답신은 다음과 같다.

“보내온 서신을 받고 누누이 말한 사연에서 족하(足下)가 화를 뉘우치고 옛 정을 찾으려는 뜻이 있음을 알았으니 매우 좋은 일입니다. 이미 지난 일은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만, 그 중에서 한두 가지 답할 바가 있어서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과 사귀기를 형제간같이 하여 신의를 다지고 화목을 닦으며 조금도 틈 없이 지낸 지가 2백여 년이고, 대마도는 동번(東藩)이라고 일컫고 우리나라를 신하로서 섬겨왔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대우하기도 매우 후하게 하여 곡식을 주어 먹이기도 했고 베를 주어 옷을 입히기도 하였습니다. 온 섬의 백성이 그 할아버지 아버지 때부터 길러준 은택을 입어 생활을 해왔으니 조그만 것도 우리나라의 은택이었습니다. 족하가 나이가 어려서 혹시 듣지 못했으면 노인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 벌레와 뱀 같은 미물도 오히려 은혜 같을 줄을 아는데 사람이 은혜를 알지 못하고 원망으로 덕을 갚는다면 하늘의 이치에 있어 어떻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온 섬의 사람들이 모두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속으로 화심(禍心)을 품고 병란을 일으킨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인데, 두 나라의 민생이 흘린 피가 땅을 물들이고 사망한 사람의 수효도 천 명 만 명이나 되니 그러한 자는 참으로 천지와 귀신에게 용서받을 수 없으므로 사람에게 해를 입지 않으면 반드시 남모르게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하늘의 도는 어그러지지 않아서 착한 이에겐 복을 주고 악한 이에겐 앙화를 준다.’했고, 또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기나 하늘이 정해지면 또한 사람을 이긴다.’했으니, 한 때의 강하고 약함은 논할 바가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충성으로 윗사람을 섬기고 신의로 이웃과 사귀어 지나치게 진실하기만 하고 거짓은 헤아려보지 않았던 탓으로 이렇게 되었습니다. 화를 당함은 비록 깊었지만 의리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니 무슨 말을 더하겠습니까. 왕자가 탈이 없음을 청정은 스스로 자기의 공로라고 말하는데, 지금 들으니 족하의 계책에서 나온 것이라 하니 만약 그렇다면 옛 정의가 다 끊어지지 않은 것이며 하늘이 실로 그 마음을 유도하여 두 나라의 화를 늦추어준 것입니다. 오직 이 일 하나만으로도 남의 마음을 감동시킬 만하니 매우 훌륭하십니다.

대명(大明)은 천지(天地)와 같은 은덕으로 남쪽과 북쪽을 모두 받아들여 끝까지 군사로 민생을 해치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처음에는 귀국의 소청을 받아주어 심 유격(沈遊擊)이 여러 차례 왕래하여 봉공하게 해달라는 소청이 곧 이루어지게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중간에서 어지러운 말이 나돌기를 ‘일본은 실상 명나라에 귀부할 뜻이 없고 그 소망도 봉공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전일에 침범하려는 계획을 아직도 포기한 것이 아니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명나라 사람에게서 나온 것도 아니고 조선 사람에게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실상 족하와 같이 일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와 날마다 더욱 전파되고 있던 차에 안강(安康)에서 노략질한 일이 생기어 그 말이 실증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명나라에서 매우 괴이하게 여겨 비록 심 유격의 극진한 주선이 있었으나 조정에서는 의심과 믿음이 상반되어 일이 어긋나서 지금도 결정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또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이러한 사실들을 족하도 오래 지나면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니 지금은 더 운운하지 않겠습니다. 춘추 시대에는 조그마한 나라라도 항복하는 맹세를 큰 부끄러움으로 삼았는데, 하물며 당당한 중국은 만국을 신첩(臣妾)으로 여기고 정병이 백만이나 되며 팔방에서 풍화를 받들어 어기고 대항하는 이가 없는데, 귀국은 공손함을 두터이 하지 않으면서 위력과 포학으로 요구하려 하니, 이것은 들어오라고 하면서 문을 닫는 것과 같습니다. 이 일은 족하가 깊이 생각해서 잘 처리하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족하가 우리 국가에 대해 은혜를 저버린 것이 비록 심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아직도 너무 심하게 대하려는 뜻이 없고 모든 처분을 다 중국의 명령에 따라 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족하가 생각을 고치어 병기를 멈추게 함이 무(武)가 됨을 알고, 조심하지 않으면 스스로 불타 죽게 됨을 경계해서 천조(天朝)에는 공근한 예절을 지극히 하고 우리나라에는 그 배반하는 마음을 바꾸면, 거의 천도(天道)가 순종함을 도와주고 인모(人謀)가 능한 자와 더불어 꾀하게 될 것입니다. 동우(東隅)의 지나간 일은 비록 어쩔 수 없지만 상유(桑楡)의 잃음은 보충하기에 늦지 않을 것 입니다. 족하의 뜻은 또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이와 같이 회답하며 나머지는 다 갖추지 못합니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22책 337면
【분류】 *군사-통신(通信) / *외교-왜(倭)

[註 2592]동우(東隅)의 지나간 일은 비록 어쩔 수 없지만 상유(桑楡)의 잃음은 보충하기에 늦지 않을 것 : 처음에는 잘못했으나 나중에 잘함을 말함. 동한(東漢) 때 풍이(馮異)가 적미병(赤眉兵)을 효저(殽底)에서 파하니 광무 황제가 글을 내려 위로하기를 “처음에는 회계(回谿)에서 실패했으나 끝내는 민지(澠池)에서 떨쳤으니 동우에서 잃었으나 상유에서 거두었다고 하겠도다.”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열전(列傳) 제7 풍이전(馮異傳). ☞  

(원문)

○ 慶尙監司答賊將書曰: “得來書, 辭意縷縷, 知足下有悔禍尋舊之意, 甚善甚善。 旣往之事, 言之無益, 然其中有一二復者, 不得遂已。 我國與日本, 交好如昆弟, 講信、修睦, 無纖毫間隙二百餘年, 至於對馬島, 則稱爲東藩, 臣附我國, 故國家待之甚厚, 船粟以哺之, 輦布以衣之。 擧一島之民, 自乃祖、乃父, 無不被涵濡(卯)〔卵〕育, 以得生活, 秋毫皆國家之恩。 足下年幼, 或未聞知, 詢之黃髮, 可知也。 嗚呼! 蟲蛇微物, 猶知報恩。 人而不知恩惠, 以怨報德, 則其於天理, 如何耶? 然豈一島之人, 盡皆爲此耶? 其陰懷禍心, 造起兵端者, 必有其人, 而兩國生靈, 肝腦塗地, 以千萬計。 斯人者, 實天地鬼神所不容, 明無人禍, 必有陰誅。 古人云: ‘天道不僭, 福善禍淫。’ 又曰: ‘人衆則勝天, 天定亦能勝人。’ 一時强弱, 不足論也。 我國家, 忠以事上, 信以交隣, 過於推誠, 不計詐諼, 以至於此。 受禍雖深, 於義無愧, 尙何言哉? 王子無恙, 淸正自以爲己功, 今聞事出足下。 若果然則舊義猶未盡絶, 而天實誘衷, 以緩兩國之禍。 惟此一事, 足感人心, 嘆尙嘆尙。 大明, 天覆地載, 兼受南北, 不欲窮極兵力, 以戕生靈, 初許貴國納款, 沈游擊往來非一, 封款之請, 不日可成, 而不意有中間交亂之言, 以爲: ‘日本, 實無款附之意, 其所望又不止於封貢, 而前日犯順之計, 猶未已也。’ 此言非出於大明之人, 亦非出於朝鮮之民也。 實出於足下同事人之口, 日益播傳, 繼有安康搶掠之事, 以實其言。 以此皇朝, 深加怪責, 雖有沈遊擊周旋致力, 朝廷疑信相半, 事機參差, 至今未決, 又誰咎哉? 此事, 足下久必知之, 今不復云云。 夫以春秋小國, 猶以城下之盟爲恥。 況於堂堂天朝, 臣妾萬國, 精甲百萬, 八表承風, 物無違拒, 貴國恭順不篤, 而欲以威暴要之, 是猶欲其入而閉之門也。 此在足下深思善處之如何耳。 足下於國家, 負恩雖深, 而國家尙未有已甚之意。 凡所處分, 盡從天朝所命。 倘足下飜然改圖, 知止戈之爲武, 戒不戢之自焚, 於天朝則極致恭勤之節, 於本國則變其反噬之心, 庶幾天道助順, 人謀與能, 東隅之逝, 雖不可追, 而桑楡之失, 補之非晩。 未知足下之意, 又復如何? 謹此奉復, 餘不具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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