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체찰사(韓孝純)와 체찰사의 기록
                                             

임진년(壬辰年)(1592년) (韓孝純官職 - 左監司), 체찰사(尹斗壽)

11월은 기록에 없음

12월 초10일 [양력 1593년 1월 12일]<병신>
<장계에서> 흉한 적들이 여러 도에 널리 가득 차 있고, 오직 이 곳 호남만이 다행히 하늘의 도움에 힘입어 다소 보완하여 한 나 라의 근본을 이루고 있으니,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회복하는 일을 다 이 도에서 마련하여야 하는데, 지난 육·칠월 사이에 육 만의 군마와 허다한 군량을 모두 서울 등지에서 잃어버리고, 병마사가 거느렸던 사만의 군사들도 또한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없어서 얼고 주려서 다 없어졌는데, 이제 순찰사가 또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북상하며 다섯 의병장도 서로 이어 군사를 일으켜 멀리 출전하게 되므로 이 뒤부터는 온 지방의 소동이 공사간의 재물을 다 없애고, 비록 늙고 허약한 백성은 있다 해도 병기와 군량을 운반할 무렵에는 채찍질이 빈번하여 구덩이에 넘어지는 자가 많이 있다. 더구나 소모사가 내려와서 내륙과 연해안을 분별하지 않은 채, 소집할 군사의 수만을 결정하여 심하게 독촉하므로, 각 고을 에서는 그 수를 충당하기 어려워서 변방을 지키는 수졸을 많이 빼내어 갈 뿐 아니라, 체찰사의 종사관이 각 고을을 분담·검색 하여 남아있는 장정을 재촉하여 징발하고, 변방의 진포에 있는 군기를 또한 많이 다른 곳으로 실어가며, 복수장 고종후(高從厚) 등이 또 따라 일어나서 내시의 종을 남김없이 뽑아내는데, 소모관이 방금 내려와서 번갈아 수색하는 일이 거의 쉬는 날이 없으므로 백성들의 근심하고 원망하는 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으니, 국가가 부흥되어야 할 시기에 바라는 바, 실망이 커서 한 모퉁이 에 있는 외로운 신하로서는 북쪽을 바라보고 통탄하며, 마음은 죽고 형태만 남아 있다. 지난해 분부한 서장에 "각 고을에서 도망한 군사들이 있어도 사 변이 평정될 때까지 친족이나 이웃에게 대충 징발하는 것을 일체 면하라"고 했다. 무릇 신하된 자로서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지 않은 자가 없다. 그러나 이같이 위태롭고 어려운 날을 당하여 수졸 한 명은 무던히 평시의 백 명에 적합한 것인데, 한번 "대충 징발하지 말라"는 명령을 듣고서는 모두 다 면제될 꾀를 품기 때문에 지난달에는 열 명이나 유방군을 보내던 고을이 이번 달에는 겨우 서너 명을 보내고 있으며, 어제 열 명이 있던 유방군이 오늘 너댓 명 안이므로 몇 달 내에 수자리를 지키는 일이 날로 비어 진포의 장수들 이 속수무책일 것인 바, 배를 타고 적을 토멸함에 무엇을 힘입어 제어할 것이며, 성을 지켜 항전함에 누구를 의지해야 할까. 만일 전례를 지켜 책임 수량을 채운다면 분부를 어기게 될 것이며, 분부를 준수한다면 수자리를 지킬 사람이 없을 것이므로, 이 두가지중에 편한 방법을 참작하여 처리하도록 하는 의견을 체찰사(尹斗壽)에 게 보고하였던 바, 회답 공문에, "친족에게 대충 징발하는 폐단은 백성을 괴롭히는 것 중에 가장 심한 것이므로 임금의 분부대로 단연히 준수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보고한 의견도 또한 일리가 있는 것이니, 적을 방어하고 백성을 어루만지는데, 양편이 다 좋은 일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 고을 관원들에게 "사람이 죽고 자손이 끊어진 호구를 도목장에서 뽑아 없애 버리도록 하라."고 통고했다. 대체로 보아 변방에서 한번 실패하면, 그 해독이 중앙에까지 미치는 실례는 이미 경험한 일이다. 하물며, 본도에 분산된 방위군 의 수는 경상도와 같지 않고, 매번 방비에 임하는 군사가 큰 진 이 많아야 삼백스무 여 명을 넘지 못하고 작은 보에는 백쉰 여 명도 차지 못하는 데, 그 중에서 도망하거나 죽은 지 오래된 채 정리되지 않은 자가 십중팔구이며, 현재 일하고 있는 자로는 태반이 늙고 쇠약한 사람이므로 만일 친족에게 대충 징발하는 것을 전적으로 면제한다면 성을 지키고 배를 운행하는데, 아무런 조처 가 없을 것이므로 지극히 민망할 뿐 아니라, 이번에 도착된 것으로 비변사에서 분부를 받고서 보내온 공문 내용에, " 근래에 와 서 적을 토멸하는 데는 해전을 당할만한 것이 없으니, 전선의 수를 넉넉하게 더 만들도록 하라."고 한 바, 전선은 비변사의 공문 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본영과 여러 진포에 명령하여 많은 수를 더 만들도록 하였다. 그러나 한 척의 전선에 사부와 격군을 아울러서 백서른 여 명의 군사를 충당할 방법이 없어서 더욱 민망하니, 위의 '친족에게 징 발하는 일들"을 사변이 평정될 때까지 전과 같이 시행하되, 조금 씩 좋고 나쁜 점을 가려내어 백성의 원성을 풀어주는 것이 지금 으로서는 가장 당연한 급선무이다. 그러니 조정에서는 다시 헤아려 생각하고, 우선 "친족에게 대충 징발하지 말라"한 명령을 중지하여 길이 남쪽 변방을 회복하는 기초가 온전해지도록 해야겠다. 수군으로 방비에 임하는 수가 저같이 너무 적은데, 방비 임무에 결석하여 죄를 지은 무리들이 혹은 소모군에 붙으며, 혹은 다투어 의병으로 붙어서 어느 쪽이든지 소속되는 바, 지금 같이 봄철 의 방비가 매우 급한 때에 방어하는 군사를 다른 곳으로 소속을 옮겨서 변방을 충실하게 항 뜻은 없으므로 일체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도록 각별히 널리 백성들에게 분부를 내리도록 해야겠다. 겨울 석 달 동안에 사색 제방군(四色除防軍)은 평시에는 그대로 있다가 전적으로 사변이 일어날 때 쓰이는 보충군이거니와 이런 큰 사변을 당하여서는 정규군도 많지 않은데다가 또 사색 군졸마저 면제해 버리면 더욱 방비할 길이 없다. 해상으로 출전한 여가 에 전선을 보수하고 병비를 조련하는 일들이 전혀 수졸들의 책임 이므로 사색 제방군 등을 육군과 함께 방위 임무에서 면제하지 말고 남김없이 방위에 임하도록 각 진포에 아울러 검칙하였으며, 순찰사에게도 공문을 보내었음을 갖추어 아뢰었다.

계사년(癸巳年)(1593년) (韓孝純官職 - 左監司), 체찰사(尹斗壽)

1월 기록에 없음

4월 기록에 없음

5월 초10일 [양력 6월 8일]<계해>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출항하여 견내량에 이르러 저녁나절에 작은 마루위로 올라가 앉았다. 흥양(고흥)의 군사를 점검했다. 기약한 날짜를 어긴 여러 장수들의 죄를 처벌하였다. 우수사· 가리포첨사도 모이어 같이 이야기했다. 조금 뒤에 선전관 고세충(高世忠)이 임금의 분부(宥旨)를 받들고 와서 전하였는데 보니, "부산으로 후퇴하여 돌아가는 왜적을 무찌르라."는 것이었다. 부찰사(金玏)의 군관 민종의(閔宗義)가 공문을 가지고 왔다. 저녁에 영남우후 이의득 (李義得)·이영남(李英男)이 와서 봤다. 앉아서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져 돌아갔다. 봉사 윤제현(尹齊賢)이 본영에 이르렀다는 편지가 왔다. 곧 답장을 보냈다. 그것은 본영에서 좀 기다리라는 내용이다. 거제도 견내량 진중에는 전라우대장(全羅左右大將)·경상중위장 (慶中衛將) 김승룡(金勝龍)·경상우대장 전위장(慶尙右大將 前衛 將) 기효근(奇孝謹)·좌중위장(左中衛將) 권준(權俊)·우중위장(右 中衛將) 구사직(具思稷)·좌좌부장(左左部) 신호(申浩)·전부장(前 部) 이순신(李純信)·중부장(中部) 어영담(魚泳潭)·척후장(斥候) 김완(金浣)·김인영(金仁英)·유군장(遊軍將) 황정록(黃廷祿)·우 부장(右部) 김득광(金得光)·후부장(後部) 가안책(賈安策)·대장 (代) 송여종(宋汝悰)·참퇴장(斬退) 이응화(李應華)

5월 11일 [양력 6월 9일]<갑자> 맑다.
선전관이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우수사의 진중으로 갔더니, 이홍명(李弘明)과 가리포첨사도  왔었다. 바둑을 두기도 했다. 순천부사가 또 오고, 광양현감이 이어서 왔다. 가리포첨사가 술과 고기를 내었다. 조금 있다가 영등포(거제시 장목면 구영리)로 적정을 탐지하러 갔던 사람들이 돌아와 보고하여 말하기를, "가덕도 앞바다에 적선이 무려 이백 여 척이나 머물면서 드나들며 웅천에는 전일과 같다."고 했다. 선전관이 돌아갈 때 임금의 분부를 집행하는데 관해서 도원수·체찰사(尹斗壽)에게 삼도의 공문을 한 서류로 만들어, 그걸 가지고 가는 사람도 함께 떠나보냈다. 이 날 남해현감도 와서 봤다.

7월 27일 [양력 8월 23일]<기묘> 맑다.
우수사의 우후(이정충)가 본영에서 와서 우도의 사정을 전하는데, 놀랄만한 일들이 많았다. 체찰사(尹斗壽)에게 갈 편지와 공문을 썼다. 경상우수사의 영리가 체찰사(尹斗壽)에게 갈 서류 초안을 가지고 와서 보고 했다.

7월 28일 [양력 8월 24일]<경진> 맑다.
아침에 체찰사(尹斗壽)에게 가는 편지를 고쳤다. 경상우수사(원균) 및 충청수사(정걸)과 본도우수사(이억기)가 함께 와서 약속했다. 그러니 수사 원균(元均)의 나쁜 마음과 간악한 속임수는 아주 형편이 없다. 정여흥(鄭汝興)이 공문과 편지를 가지고 체찰사(尹斗壽) 앞으로 갔다. 순천부사·광양현감이 와서 보고 곧 돌아갔다. 사도 첨사(김완)가 복병했을 때에 잡은 보자기 열 명이 왜놈 옷으로 변장하고 하는 짓거리가 매우 꼼꼼하다 하여 잡아다가 추궁을 하니, "경상우수사(원균)가 시킨 일이다."고 했다. 곤장만 쳐서 놓아 줬다.

9월 초2일 [양력 9월 26일]<계축> 맑다.
장계의 초안을 잡아서 내려 줬다. 경상우후 이의득(李義得)·이여 념(李汝恬) 등이 와서 봤다. 어두울 녘에 이영남(李英男)이 와서 보고, 또 전하기를, 병마사 선거이(宣居怡)가 곤양에서 공로를 세웠다고 한 것과 남해현령(奇孝謹)이 체찰사(尹斗壽)에게 꾸중을 들었는데 공손치 못하다는 이유로 불려 간 것이다 고 말했다. 우습다. 기효근(奇孝謹)의 형편없는 짓이야 이미 알고 있는 터이다.

9월 10일 [양력 10월 4일]<신유> 맑다.
공문을 적어 탐후선에 보냈다. 저녁나절에 우수사의 배에 이르러 방답첨사와 함께 술을 마시고 헤어졌다. 체찰사(尹斗壽)의 비밀편지가 왔다. 보성군수(김득광)도 왔다가 갔다.

10월 기록에 없음

11월 기록에 없음

12월 기록에 없음

갑오년(甲午年)(1594년) (韓孝純官職 - 監司, 兵曹參判), 체찰사(尹斗壽)

2월 초1일 [양력 3월 22일]<경술> 맑다.
느지막이 활터 정자로 올라가 공무를 보고 공문을 써 보냈다. 청주의 겸사복 이상(李祥)이 임금의 분부(宥旨)를 가지고 왔다. 그 내용에 경상감사 한효순(韓孝純)의 장계에 "좌도의 적들이 모여서 거제로 들어가서 앞으로 전라 땅으로 침범하려 하니, 경은 삼도의 수군을 합하여 적을 섬멸하라"는 것이었다. 오후에 우수사위 우후(이정충)을 불러 활을 쏘았다. 초저녁에 사 도첨사(김완)가 전선 세 척을 거느리고 진에 이르렀다. 이경복(李 景福)·노윤발(盧潤發)·윤백년(尹百年) 등이 도망군을 싣고 뭍으로 옮겨가는 배 여덟 척을 붙잡아 왔다. 저녁에 가랑비가 내리더니 얼마 안가 그쳤다.

9월 27일 [양력 11월 9일]<임인> 아침에 맑더니 저물녘에 잠깐 비가 내렸다.
아침에 출항하여 포구에 나가자 여러 배들도 일제히 출항하여 적 도(거제시 둔덕면) 앞바다에 대었다. 그러니 첨지 곽재우(郭再祐) ·충용 김덕령(金德齡)·별장 한명련(韓明璉)·주몽룡(朱夢龍) 등 이 와서 약속하고 각각 원하는 곳으로 갈라 보냈다. 저녁에 병사 선거이(宣居怡)가 배에 이르렀으므로 본영의 배를 타게 했다. 저물무렵 체찰사(尹斗壽)의 군관 이천문(李天文)· 림득의(林得義)· 이홍사(李弘嗣)· 이충길(李忠吉)· 강중룡(姜仲龍)· 최여해(崔汝諧)· 한덕비(韓德備)· 이안겸(李安謙)· 박진남(朴振男) 등이 왔다. 밤에 잠깐 비가 내렸다.

10월 26일 [양력 12월 7일]<경오> 맑다.
빙부(方震)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첨지 신호(申浩)에 게서 들으니, 김상용(金尙容)이 이랑(吏郞)이 되어 서울로 갈  때에 남원부내에 들어가자면서 체찰사(尹斗壽)를 보지 않고 갔다고 했다. 시절이 이러하니 참으로 해괴하다. 체찰사가 밤에 순변사의 숙소 로 갔다가 밤이 깊어서 돌아와 그의 숙소로 왔다고 했다. 체모가 이럴 수가 있는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종 한경(漢京)이 본영으로 갔다. 오후 여섯 시께 비가 오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12월 기록에 없음

을미년(乙未年)(1595년)(韓孝純官職 - 兵曹參判 兼 京城巡察使), 체찰사(李元翼)

8월 19일 [양력 9월 22일]<기미> 날씨가 활짝 개었다.
두 조방장 및 방답첨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밤 열 시쯤에 조카 봉·아들 회·울(蔚)이 들어왔다."체찰사(李元翼)가 21일 에 진주성에 이르러 군사에 관한 일을 묻고자 체찰사의 군관이 들어왔다."고 하였다.

8월 20일 [양력 9월 23일]<경신> 맑다.
종일 체찰사의 전령을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경상수사 권준(權俊)· 우수사(이억기)· 발포만호(황정록)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밤 열 시쯤에 전령이 들어왔다. 한밤 자정에 배를 타고 곤이도(통 영시 산양면 곤리도)에 이르렀다.

8월 22일 [양력 9월 25일]<임술> 맑다.
이른 아침에 각종 공문을 만들어 체찰사에게 보냈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걸어서 사천현에 이르렀다. 오후에 진주 남강 가에 이르니, 체찰사(李元翼)는 벌써 진주에 들어왔다고 했다.

8월 23일 [양력 9월 26일]<계해> 맑다.
체찰사(李元翼) 있는 곳으로 가서 조용히 이야기하는 사이에 백성을 위해 서 고통을 덜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났다. 호남순찰사는 헐 뜯어 말하는 기색이 많으니, 한탄스럽다. 저녁나절에 나는 김응서 (金應瑞)와 같이 촉석루에 이르러 장병들이 패전하여 죽은 곳을 보니,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윽고 체찰사가 나더러 먼저 가라고 하므로 배를 타고 소비포로 돌아와 정박했다.

8월 24일 [양력 9월 27일]<갑자> 맑다.
새벽에 소비포 앞에 이르니, 고성현령 조응도(趙應道)가 와서 알현하고서 소비포 앞바다에서 잤다. 체찰사(李元翼)·부사(김륵)과 종사관 (노경임)도 잤다.

8월 25일 [양력 9월 28일]<을축> 맑다.
일찍이 식사를 한 뒤에 체찰사(李元翼)와 부사(金玏)·종사관(노경임)은 함께 내가 탄 배를 타고, 오전 여덟 시쯤에 출항하여, 같이 서서 여러 섬들과 여러 진을 합병할 곳과, 또 접전할 곳 등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면서 종일 의논했다. 곡포(남해군 이동면 화계리)는 평산포 (남면 평산리)에 합하고, 상주포(상주면 상주리)는 미조항(미조면 미조리)에 합하고, 적량(창선면 진동리 적량)은 삼천포(사천시 삼 천포)에 합하고, 소비포(고성군 하이면 덕명포)는 사량(통영시 사량면 금평리)에 합하고, 가배량(거제시 도산면 노전동)은 당포(통 영시 산양면 삼덕리)에 합하고, 지세포(일운면 지세포리)는 조라 포(일운면 구조라리)에 합하고, 제포(진해시 웅천 1동 제덕동)는 웅천에 합하고, 율포(거제시 장목면 대금리)는 옥포(거제시 장승 포시 옥포동)에 합하고, 안골포(진해시 안골동)는 가덕진(부산시 강서구 천가동)에 합치기로 결정했다. 저녁에 진중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고 공 사례를 한 다음 헤어졌다.

8월 28일 [양력 10월 1일]<무진> 맑다.
이른 아침에 체찰사(李元翼) 및 부사(金玏)·종사관(盧景任)이 같이 다락 위에 앉아 여러 가지 폐단 되는 점을 의논했다. 식사를 하기 전에 배로 내려와 서 배를 타고 나갔다.

8월 29일 [양력 10월 2일]<기사> 맑다.
일찍 나가 공무를 봤다. 경상수사가 체찰사(李元翼) 있는 곳에서 왔다.

9월 초5일 [양력 10월 7일]<갑술> 맑다.
아침에 경상수사 권준(權俊)이 소고기를 조금 보냈다. 충청수사 ·조방장 신호(申浩)와 같이 식사를 하고 난 뒤에 신 조방장·충 청수사 선거이(宣居怡)와 함께 같은 배로 경상수사 있는 곳으로 가서 종일 이야기하고 저물어서야 돌아왔다. 이 날 체찰사의 공문이 왔는데, 순천·광양·낙안·흥양이 갑오년(1594년)의 전세 (田稅)를 실어 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곧 답장했다.

12월 초8일 [양력 1월 7일]<병오> 맑다.
우우후·남도포만호가 와서 봤다. 체찰사의 전령이 왔는데, 가까운 시일 안으로 만나자는 것이었다.

12월 15일 [양력 1월 14일]<계축> 맑다.
체찰사에게로 갔던 진무(鎭撫)가 와서, "18일에 삼천포에서 만나 자"고 하므로 달려가기로 했다. 초저녁에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12월 17일 [양력 1월 16일]<을묘> 비가 뿌렸다.
삼천포진 앞에 이르니, 체찰사는 사천에 이르렀다고 한다.

12월 18일 [양력 1월 17일]<병진>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삼천포진으로 나아갔다. 오정 때에 체찰사가 보(堡)에 이르러 같이 조용히 이야기했다. 초저녁에 체찰사가 또 같이 이야기하자고 청하므로 이야기하는 데, 밤 두 시가 되어서야 헤어졌다.

12월 19일 [양력 1월 18일]<정사>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나가 공무를 봤다. 군사들에게 음식을 실컷 먹이고 난 뒤에 체찰사가 떠나갔다. 나는 배로 내려오니 바람이 몹시 사나와 출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머물러서 밤을 지냈다.

병신년(丙申年)(1596년) (韓孝純官職 - 副道體察使)

1월 10일 [양력 2월 7일]<정축> 맑으나 하늬바람이 세게 불었다.
이른 아침에 적이 다시 나올지를 점쳤더니, 수레에 바퀴가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 다시 점쳤더니, 임금을 보고 모두들 기뻐하는 것과 같다는 좋은 괘였다. 식사를 한 뒤에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우우후가 어란포에 서 와서 봤다. 사도첨사도 왔다. 체찰사가 여러 가지 물건을 나누어 주도록 세 위장에게 분부하였다. 웅천현감·곡포권관·삼천 포권관·적량만호가 아울러 와서 봤다.

1월 13일 [양력 2월 10일]<경진> 맑다.
아침에 경상수사가 와서 보고하고 배를 타고 견내량으로 갔다. 저녁나절에 대청으로 나가 공문을 처리하여 보냈다. 체찰사에게 올리는 공문을 내 보냈다. 성균관의 종은, 선비들이 성균관의 학 문을 다시 세운다는 글을 가지고 온 자인데 아뢰고 돌아갔다. 이 날 바람이 자고 날씨가 따사했다. 이 날 저녁에 달빛은 낮과 같고, 바람 한 점 없다. 홀로 앉아 있으니, 마음이 어지러워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신홍수(申弘壽)를 불러 휘파람을 불게 했다. 밤 열시쯤에 잠들었다.

1월 21일 [양력 2월 18일]<무자> 맑다.
아침에 나가 공무를 봤다. 체찰사에게 보낼 순천 공문을 작성했다. 밥을 먹은 뒤에 미조항첨사 및 흥양현감이 와서 보기에 술을 먹여 보냈다. 미조항첨사는 휴가를 신청했다. 저녁나절에 대 청으로 나가니 사도첨사·여도만호·사천현감·광양현감·곡포권 관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곤양군수도 왔다. 활 열 순을 쏘았다.

2월 11일 [양력 3월 9일]<무신> 맑다.
아침에 체찰사에게 공문을 만들어 보냈다. 보성의 계향유사(군 량보급 책임자) 림찬(林瓚)이 소금 쉰 섬을 실어 갔다. 임달영(任 達英)이 논산(論山)에서 돌아왔다. 논산(論山)의 편지와 박종 백(朴宗伯)·김응수(金應綏)의 편지도 가지고 왔다. 장흥부사와 우우후가 왔다. 또 낙안군수와 흥양현감을 불러 활을 쏘았다. 막 해떨어질 무렵 영등포만호가 그 소실을 데리고 술을 들고 와서 권했다. 나이 젊은 계집도 왔는데 놔두고 돌아갔다. 땀을 흘렸다.

2월 28일 [양력 3월 26일]<을축> 맑다.
일찍 침을 맞았다. 저녁나절에 나가 앉아 있으니 장흥부사와 체찰사의 군관이 이곳에 이르렀는데, 장흥부사는 종사관이 발행 한 전령으로 자기를 잡으러 온 일 때문에 왔다고 했다. 또 전라도 수군 안에서 우도의 수군이 전라좌·우도를 왔다 갔다 하면서 제주와 진도를 성원한다고 했다. 우습다. 조정에서 꾀하는 정책이 이럴 수가 있나! 체찰사가 꾀를 내는 것이 이렇게도 알맹이가 없단 말인가! 나라의 일이 이러하니 어찌할꼬! 어찌할꼬! 저녁에 거제현령을 불러 와서 일을 물어보고 나서 돌려보냈다.

2월 29일 [양력 3월 27일]<병인> 맑다.
아침에 공문초안 잡은 것을 수정했다. 식사를 한 뒤에 나가 앉아 있으니, 우수사 및 경상수사·장흥부사·체찰사의 군관이 왔다. 경상우도 순찰사의 군관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2월 30일 [양력 3월 28일]<정묘> 맑다.
아침에 정사립(鄭思立)으로 하여금 보고문을 써서 체찰사에게 보냈다. 장흥부사도 체찰사에게 갔다. 해가 뉘엿할 때 우수사가 보고하는데, "벌써 바람이 따뜻해졌으니 협동작전할 계획이 시급하여 소속 부하를 거느리고 본도(전라우도)로 가고자한다"는 것이었다. 그 마음가짐이 몹시도 해괴하여 그의 군관 및 도훈도에게 곤장 일흔 대를 때렸다. 저녁에 송희립(宋希立)·노윤발(盧潤發) ·이원룡(李元龍) 등이 들어왔다. 희립은 또 술을 가지고 왔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밤새도록 식 땀을 흘렸다.

3월 11일 [양력 4월 8일]<무인> 흐렸다.
해·회·완(莞) 및 수원(壽元)은 계집종 세 사람과 더불어 나갔다. 이 날 저녁에 방답첨사(張麟)가 성낼 일도 아닌데 공연히 성을 내어 상선(上船)의 물긷는 기전자(田子)에게 곤장 을 쳤다니, 참으로 놀랄 일이다. 곧 군관과 이방(吏房)을 불러 군관에게는 스무 대, 이방(吏房)에게는 쉰 대를 매로 볼기쳤다. 저녁나절에 구 천성보만호가 하직하고 돌아가고, 새 천성보 만호는 체찰사의 공문으로 병사에게 잡혀 갔다. 나주판관도 왔기에 술을 먹여서 보냈다.

3월 12일 [양력 4월 9일]<기묘>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몸이 노곤하여 잠깐 잠을 잤더니 처음으로 피로가 가신 듯하다. 경상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여도 만호·금갑도만호·나주판관도 왔다. 군관들이 술을 내었다. 저녁에 소국진(蘇國秦)이 체찰사에게서 돌아왔는데, 그 회답에 우도의 수군을 합하여 본도로 보내라는 것은 본의가 아니라고 하였다. 우습다. 그 편에 들으니 원흉(원균)은 곤장 마흔 대를, 장흥 부사는 스무 대를 맞았다고 했다.

3월 14일 [양력 4월 11일]<신사> 궂은비가 걷히지 않는다.
새벽에 삼도에서 급한 보고가 왔는데, "견내량 근처의 거제땅 세 포(사등면 성포리)에 왜적선 다섯 척과 고성 땅에 다섯 척이 정박 하여 뭍에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삼도의 여러 장수들에게 배 다섯 척을 더 뽑아 보내도록 전령했다.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보 고 각 처에 공문을 처리하여 보냈다. 아침에 군량 회계하는 것을 마쳤다. 방답첨사·녹도만호가 와서 봤다. 체찰사에게 공문을 보내려고 서류를 만들었다. 봄철 노곤함이 이에 이르니 밤새도 록 땀이 흘렀다.

3월 26일 [양력 4월 23일]<계사> 맑고 마파람이 불었다.
저녁나절에 나가 앉아 있으니, 조방장 및 방답첨사·녹도만호가 와서 활을 쏘았다. 경상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체찰사의 전령 이 왔는데, "전일(12일)에 우도의 수군을 돌려보내라고 한 것은 회계(回啓)를 잘못 본 탓이다."고 하였다. 우습다.

3월 29일 [양력 4월 26일]<병신> 궂은비가 걷히지 않았다.
저녁나절에 부찰사(韓孝純)의 통지문이 먼저 이곳에 왔는데, 성주에서 진으로 온다고 했다.

4월 초2일 [양력 4월 28일]<무술> 저녁나절에 개었다.
저물녘에 경상수사가 부찰사(韓孝純)를 마중하는 일로 나갔다. 신사과는 같은 배로 갔다. 이 날 밤 몸이 몹시 불편했다.

4월 초4일 [양력 4월 30일]<경자> 흐렸다.
아침에 오철(오철)이 나갔다. 종  금이(금이)도 같이 갔다.  아침에 체찰사의 공문에 도장을 찍어 벽에 붙였다. 여러 장수가 표신을 고쳤다. 우수사에게 가 보고는 취하여  이야기하고서 돌아왔다. 충청도의 군대에 울짱(목책)을 쳤다. 초저녁이 지나서 저녁밥을 먹었다. 속이 덥고 땀이 났다. 밤 열시쯤에 잠깐 비가 그쳤다.

4월 초5일 [양력 5월 1일]<신축> 맑다.
부찰사(韓孝純)가 들어왔다.

4월 초6일 [양력 5월 2일]<임인>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부찰사(韓孝純)가 활쏘기를 시험했다. 저녁에 나는 우수사 등과 들어가 앉아서 군사들에게 같이 마주하여 음식을 먹였다.

4월 7일 [양력 5월 3일]<계묘> 맑다.
부찰사(韓孝純)가 나가 앉아서 상을 나누어 주었다. 새벽에 부산 사람이 들어왔는데, "명나라 사신(이종성)이 달아났다."고 하니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부찰사(韓孝純)가 입봉(立峯)에 올라갔다. 점심을 먹은 뒤에 두 수사와 더불어 같이 이야기했다.

4월 8일 [양력 5월 4일]<갑진> 종일 비가 내렸다.
저녁나절에 들어가 마주 앉아 부찰사(韓孝純)와 같이 마주하여 술을 마시니 몹시 취하였다. 초파일이라 등불을 켜 달고 헤어졌다.

4월 9일 [양력 5월 5일]<을사> 맑다.
이른 아침에 부찰사(韓孝純)가 나갔다. 그래서 배를 타고 포구로 나가 같이 배에서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4월 26일 [양력 5월 22일]<임술> 맑다.
아침에 체찰사의 군관이 경상도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밥을 먹 은 뒤에 목욕했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체찰사의 군관 오(吳)도왔다. 김양간(金良看)이 소를 싣고 올 일로 본영으로 갔다.

4월 27일 [양력 5월 23일]<계해> 맑다.
저녁에 한 번 목욕했다. 체찰사의 공문 회답이 왔다.

5월 18일 [양력 6월 13일]<갑신> 비가 잠깐 개긴 했으나, 바다의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체찰사의 공문이 들어왔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나가 앉았다가 활을 쏘았다.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했다. 그러나 진지를 전보다 줄어들었다고 하니 걱정되어 눈물이 난다. 봄철 누비옷을 가지고 왔다.

6월 19일 [양력 7월 14일]<을묘> 맑다.
체찰사에게 공문을 써 보냈다. 저녁나절에 나가 앉았다가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이설(李渫)에게서 황정록(黃廷祿)의 형편없는 말과 발포 보리밭에서 스무여섯 섬이 났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7월 8일 [양력 8월 1일]<계유> 맑다.
충청우후와 함께 활 열 순을 쏘았다. 체찰사의 비밀 표험(標驗?) 을 받으러 갔다고 한다.

7월 9일 [양력 8월 2일]<갑술> 맑다.
아침에 체찰사에게 갈 여러 공문에 관인을 찍어서 이전(李田)이 받아 갔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가 이곳에 와서 통신사가 탈 배에 풍석(風席: 돛 만드는 돗자리)이 마련하기 어렵다고 여러 번 말했다. 빌려 쓰고자 하는 뜻이 그 말하는 속에 보였다. 박자방 (朴自邦)을 물을 끌어들일 대나무와 서울 가는 사람이 요구하는 부채만들 대나무를 얻어 올 일로 남해로 보냈다. 오후에 활 열 순을 쏘았다.

7월 11일 [양력 8월 4일]<병자> 맑다.
아침에 체찰사에게 행정선(通文船) 일로 공문을 써 관인을 찍어 보냈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가 와서 바다를 건너 갈 격군과 뒤 따라 갈 것을 의논했다. 바다를 건너갈 양식이 스무 세 섬인데, 새로 찧으니 스무 한 섬이라 두 섬 한 말이 줄었다. 나가 앉았다가 몸소 활 세 쾌를 쏘는 것을 보았다.

7월 21일 [양력 8월 14일]<병술> 맑다.
저녁나절에 나가 앉아 있으니, 거제현령·나주판관·홍주판관과 옥포만호·웅천현감·당진포만호가 왔다. 옥포에는 배 만드는데 쓸 양식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체찰사에 관계된 군량 스무 말을 주고, 웅천·당진포에는 배 만들 쇠 열다섯 근을 함께 주었다. 이 날 아들 회가 방자 수(壽)에게 곤장을 쳤다고 했다. 그래서 아들 을 붙들어다가 뜰아래에서 잘 타일렀다. 밤 열 시쯤에 땀이 줄 줄 흘렀다. 통신사가 청하는 표범 가죽을 가지고 오려고 배를 본영으로 보냈다.

7월 26일 [양력 8월 19일]<신묘> 맑다.
이전(李筌)이 체찰사에게서 와서 표험(標驗) 세 벌을 가지고 왔다. 하나는 경상수사에게 보내고, 하나는 전라우수사에게 보냈다. 의금부의 나장이 윤승남(尹承男)(다경포만호)을 잡아 갈 일로 내려왔다.

7월 29일 [양력 8월 22일]<갑오> 맑다.
경상수사 및 우후가 와서 봤다. 충청우후도 아울러 와서 활 세 쾌를 쏘았는데, 내가 쏘던 활은 고자가 들떠서 곧 수리하라 고 하였다. 체찰사에게서 과거보는 자리를 설치한다는 공문이 와 닿았다. 저녁에 점장이의 집을 맡아 지키던 아이가 세간을 몽땅 훔쳐 달아나버렸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8월 초10일 [양력 9월 2일]<을사> 맑다.
아침에 충청우후가 문병을 왔다가 그대로 조방장과 함께 같이 아침식사를 했다. 아침에 송한련(宋漢連)에게 날삼(生麻) 마흔 근을 그물을 만들도록 주어서 보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한참동안 이나 베개를 베고 누워 있었다. 저녁나절에 두 조방장 및 충청우후를 불러다가 상화(床花)를 만드는데 이를 같이 했다. 저녁에 체찰사에게 보낼 공문에 관인을 찍었다. 어두워지니 달빛은 비단 같고, 나그네 회포는 만 갈래여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밤 열 시쯤에 방에 들어갔다.

8월 11일 [양력 9월 3일]<병오> 맑으나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체찰사에게 갈 여러 공문에 관인을 찍어 내보냈다. 조 방장 배흥립(裵興立)과 함께 같이 아침 식사를 하고 저녁나절에 그와 같이 활터(射場)에 가서 말달리는 것을 구경하고서 저 물 무렵에 영으로 돌아왔다. 초저녁에 거제현령이 달려와서 보고한 내용에, "왜적서 한 척이 등산(登山: 마산시 합포구 진동 면)에서 송미포(松未浦:거제시 장목면 송진포)로 들어온다."고 했다. 밤 열 시쯤에 또 보고하기를, "아자포(阿自浦)로 옮겨 대었다."고 했다. 배를 정하여내어 보낼 즈음에 또 보고하여 말하기를, "견내량을 넘어갔다."고 했다. 그래서 복병장이 찾아서 잡았다.

8월 27일 [양력 9월 19일]<임술> 맑다.
일찍 길을 떠나 사천현에 이르렀다. 점심을 먹은 뒤에 그대로 진주성(晉城)으로 가서 체찰사를 뵙고 종일 의논했다. 저물 무렵에 진주목사(나정언)의 처소로 돌아와서 잤다. 김응서도 왔다가 곧 돌아갔다. 이 날 어두울 무렵 이용제(李用濟) 가 들어왔는데, 역적 도당의 편지를 지녔었다.

8월 28일 [양력 9월 20일]<계해> 맑다.
이른 아침에 체찰사 앞으로 가서 종일 여쭙고 의논하여 결정하고, 초저녁이 지나서 진주목사의 처소로 돌아왔다. 진주목사와 함께 밤이 깊도록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청생(靑生)도 왔다.

병신년 윤달(丙申年 閏月)

윤8월 5일 [양력 9월 26일]<기사> 맑다.
활터 마루에 가서 아이들(아들들을 말함)이 말달리고 활 쏘는 것을 구경했다. 하천수(河天壽)가 체찰사 앞으로 갔다.

윤8월 11일 [양력 10월 2일]<을해> 맑다.
체찰사를 기다릴 일로 출항하여 당포에 이르니, 초저녁에 체찰사 에게 문안 갔던 사람이 돌아와서, "14일에 떠난다."고 하였다.

윤8월 14일 [양력 10월 5일]<무인> 맑다.
새벽에 두치(豆恥:하동읍 두곡리)에 이르니, 체찰사(李元翼)와 부찰사(韓孝純)가 어제 벌써 도착하여 잤다고 한다. 뒤미처 점검하는 곳으로 가서 소촌찰방을 만나고 일찍 광양현에 이르렀다. 지나온 지역이 한결같이 쑥대밭이 다 되어 그 참상은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었다. 임시로나마 전선 정비하는 것을 면제해 주어 군사와 백성들의 마음을 풀어 주어야겠다.

윤8월 15일 [양력 10월 6일]<기묘> 맑다.
일찍 떠나 순천에 이르니 체찰사 일행이 순천부 청사에 들어갔다 고 했다. 그래서 나는 정사준(鄭思竣)의 집에서 묵었다. 순찰사도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아들들이 참시관이 되었다고 들었다.

윤8월 19일 [양력 10월 10일]<계미> 맑다.
떠나서 녹도(고흥군 도양면 녹도)로 가는 길에 도양(도덕면 도덕리)의 둔전을 살펴보았다. 체찰사는 매우 기뻐하는 빛이 많았다. 녹도에서 잤다.

윤8월 20일 [양력 10월 11일]<갑신> 맑다.
일찍 떠나 배를 타고 체찰사(李元翼)와 부찰사(韓孝純)와 함께 같이 앉아 종일 군사 일을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백사정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에 그 길로 장흥부에 이르렀다. 나는 관청의 동헌에서 잤다. 김응남(金應男)이 와서 봤다.

윤8월 24일 [양력 10월 15일]<무자>
나는 부찰사(韓孝純)와 같이 가리포(완도군 완도읍 군내리)로 갔더니, 우우후 이정충(李廷忠)도 먼저 와 있었다. 남쪽 망대(남망봉 해발 150m)로 같이 올라가니, 좌우에는 적들이 다니는 길과 여러 섬들을 역력히 헤아릴 수 있었다. 참으로 한 도(一道)의 요충지이다. 그러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롭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이진(해 남군 북평면 이진리)으로 옮겨 합치기로 했다. 병영에 이르러서는 원균의 흉한 행동을 적지 않았다.

윤8월 27일 [양력 10월 18일]<신묘> 맑다.
체찰사가 진도에서 영(우수영)으로 들어왔다.

9월 4일 [양력 10월 24일]<정유> 맑다.
나주에서 머물렀다. 어두울 무렵 목사(李福男)가 술을 가지고 와서 권했다. 일추(一秋)도 술잔을 가져 왔다. 이 날 아침에 체찰사와 함께 문묘에 절했다.

9월 6일 [양력 10월 26일]<기해> 맑다.
먼저 무안의 일로 가겠다고 체찰사에게 보고하고 일을 떠났다. 고막원(古莫院:나주시 다시면 고막리)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나주감목관 나덕준(羅德駿)이 뒤쫓아 와서 서로 만났다. 이야기 하는 중에 강개한 일이 많았다. 그래서 그와 함께 오랬동안 이야기하다가 저물어서 무안에 이르러 잤다.

9월 15일 [양력 11월 4일]<무신> 맑다.
체찰사가 현(무장현)에 이르렀다고 하므로 들어가 절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여진(女眞)과 세번 관계했다.

9월 16일 [양력 11월 5일]<기유> 맑다.
체찰사 일행이 고창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에 장성에 이르러서야 잤다.

9월 17일 [양력 11월 6일]<경술> 맑다.
체찰사(李元翼)와 부찰사(韓孝純)는 입암산성(立巖山城:정주시 입암면 임암산 해발 655m)으로 가고, 나는 혼자 진원현(장성군 진원면 석전리 진원)에 이르러 진원현감과 같이 이야기했다. 종사관도 왔다. 저물어서 관청 안으로 들어가니 두 조카딸이 나와 앉아 있었다. 오랫동안 못 보았던 감회를 풀고 도로 작은 정자로 나가 진원현감 및 여러 조카들과 밤들도록 같이 이야기했다.

9월 19일 [양력 11월 8일]<임자> 바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아침에 행적(行迪)이 와서 봤다. 진원(珍原)에 있는 종사관의 편지와 윤간(尹侃)·봉( )·해( )의 문안 편지도 왔다. 이 날 아침 광주목사(최철견)가 와서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이어서 술이 나와 밤을 먹지 않아서 취해버렸다. 광주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몹시 취했다. 오후에 능성현령(李繼令)이 들어와서 곳간을 봉하고 광주목사를 체찰사가 파면시켰다고 했다. 최철견의 딸 최귀지(崔貴之)가 와서 잤다.

11월,12월 난중일기 기록 없음

정유년(丁酉年)(1597년) (韓孝純官職 - 副道體察使)

(1,2,3월 난중일기 기록 없음)

4월 3일 [양력 5월 18일]<계해> 맑다.
일찍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금오랑 이사빈(李士贇)·서리 이수영 (李壽永)·나장 한언향(韓彦香)은 먼저 수원부에 이르렀다. 나는 인덕원(의왕시 인덕원)에서 말을 쉬게 하고 조용히 누워서 쉬었다. 저물어서 수원에 들어가서, 경기 체찰사의 수하에서 심부름하는 병졸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집에서 잤다. 신복룡(愼伏龍) 은 나의 임시로 사는 집에 이르러 내 지나가는 걸 보고는 술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나를 위로했다. 순천부사 류영건(柳永健)이 나와서 봤다.

5월 6일 [양력 6월 20일]<병신> 맑다.
꿈에 돌아가신 두 분 형님을 만났는데, 서로 붙들고 우시면서 하는 말씀이 "장사를 지내기 전에 천리 밖으로 떠나와 군무에 종사하고 있으니, 대체 모든 일을 누가 주장해서 한단 말이냐. 통곡 한들 어찌하리!"라 하셨다. 이것은 두 형님의 혼령이 천리 밖까지 따라 와서 근심하고 애달파함을 이렇게까지 한 것이니 비통할 따름이다. 또 남원의 추수를 감독하는 일을 염려하시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연일 꿈자리가 어지러운 것도 아마 형님 들의 혼령이 그윽히 걱정하여 주는 탓이라 슬픔이 한결 더하다. 아침저녁으로 그립고 설운 마음에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건마는 아득한 저 하늘은 어째서 내 사정을 살펴주지 못하는고! 왜 어서 죽지 않는지. 저녁나절에 능성현령 이계명(李繼命)도 상제의 몸으로 기용된 사 람인데, 와서 보고 돌아갔다. 흥양의 종 우롬금(禹老音金)·박수매(朴守每)·조택(趙澤)과 순화(順花)의 처가 와서 인사했다. 이기 윤(李奇胤)과 몽생(夢生)이 왔다. 송정립(宋廷立)·송득운(宋得運) 도 왔다가 곧 돌아갔다. 저녁에 정원명(鄭元溟)이 한산도에서 돌아와 흉물(원균?)의 하 는 꼴을 많이 말했다. 또 부찰사(韓孝純)가 좌영으로 나와서 병 이라 하여 조리한다고 했다. 우수사(이억기)가 편지를 보내 와 조문했다.

5월 10일 [양력 6월 24일]<경자> 궂은 비 내렸다.
오늘은 태종(太宗)의 제삿날이다. 옛날부터 이 날에는 비가 온다더니, 저녁나절에는 많은 비가 왔다. 박줄생(朴注叱生)이 와서 인사했다. 주인이 보리밥을 지어서 들여왔다. 장님 임춘경(任春 景)이 운수를 봐 가지고 왔다. 부찰사(韓孝純)도 조문하는 글을 보냈다. 녹도만호 송여종(宋汝悰)은 겸하여 삼 종이(麻紙) 두 가지를 부의로 보내오고, 전라순찰사는 흰쌀·중간 쌀 각 열 말과 콩과 소금도 얻어서 군관을 시켜서 보낸다고 말했다.

5월 11일 [양력 6월 25일]<신축> 맑다.
김효성(金孝誠)이 낙안에서 왔다가 곧 돌아갔다. 전 광양현감 김성(金惺)이 체찰사의 군관이 되었다. 화살대를 구하러 순천 에 왔던 길에 왔다가 봤다. 소문을 많이 전하는데, 소문이란 것은 모두 흉물이 일이었다. 부찰사가 온다는 통지문이 먼저 왔다. 장 위(張渭)가 편지를 보냈다. 정원명(鄭元溟)이 보리밥을 지어서 내었다. 장님 임춘경(任春景)이 와서 운수 본 것을 말했다. 부찰사(韓孝純)가 순천부에 도착했다. 정사립(鄭思立)과 양정언(梁廷彦)이 전 하기를 "부찰사가 와서 만나 보자"고 하는데, 내 몸이 불편하여 만나지 못하다.

5월 12일 [양력 6월 26일]<임인> 맑다.
이원룡(李元龍)이 보내어 부찰사(한효순)에게 문안했다. 부찰사(韓孝純)는 또 김덕 린(金德 )을 보내어 문안했다. 저녁나절에 이기남(李奇男)·기윤 (奇胤)이 와서 보고는 아뢰고 도양장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아침에 아들 열을 부찰사(한효순)에게로 보냈다. 신홍수(申弘壽)가 와서 보고 원영감(원균)의 점을 쳤는데, 첫 괘가 수뢰둔(상괘 坎,하괘 震:널 리 형통하지만 기운은 최악으로 험난함)변하여 천풍구(상괘 乾,하 괘 巽:여자가 지나치게 거센 괘로서 흉사를 만나는 확률이 열에 아홉임)가 되니 이 쓰임은 본체를 이기는 것이라 크게 흉하다. 남 해 원이 조문 편지를 보내고, 또 여러 가지 물건 - 쌀 둘, 참기름 둘, 꿀 다섯, 조 하나, 미역 둘 저녁에 향사당으로 가서 부찰사와 함께 이야기하고, 자정에야 숙소로 돌아왔다. 정사립(鄭思立)·양정언(梁廷彦) 등이 왔다가 닭이 운 뒤에 돌아갔다.

5월 13일 [양력 6월 27일]<계묘> 맑다.
어젯밤에 부찰사(韓孝純)의 말이 "상사가 보낸 편지에 나에 대한 일을 많이 탄식했더라"고 한다. 저녁나절에 정사준(鄭思竣)이 떡을 만들어 왔다. 순천부사(우치적)가 노자를 보내왔다. 너무 미안하다.

5월 14일 [양력 6월 28일]<갑진> 맑다.
아침에 순천부사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부찰사(韓孝純)는 부유(순천시 주 암면 창촌리)로 향했다. 정사준(鄭思竣)·정사립(鄭思立)·양정언 (梁廷彦)이 와서 모시고 가겠다고 한다. 아침밥을 일찍 먹고 길을 떠나 송치(솔티:순천시 서면 학구리 바랑산) 밑에 이르러 말을 쉬 게 했다. 혼자 바위 위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곤하게 잤다. 운 봉의 박롱(朴 )이 왔다. 저물 무렵 찬수강(순천시 환전면과 구례 사이의 강)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걸어서 건넜다. 구례현의 손인 필(孫仁弼)의 집에 이르니, 현감(이원춘)이 와서 봤다.

5월 16일 [양력 6월 30일]<병오> 맑다.
현감과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남원의 탐 후인이 돌아와서 고하되, "체찰사가 내일 곡성을 거쳐 이 구례현에 들어와 며칠 묵은 뒤에 전주로 갈 것이다."고 했다. 원이 주물상을 무척 융숭하게 차렸다. 몹시 미안했다. 저녁에 정상명(鄭翔溟)이 왔다.

5월 19일 [양력 7월 3일]<기유> 맑다.
체찰사가 이 구례현에 들어올 것이다. 성 안에 머물고 있기가 미안해서 동문 바깥 장세호(張世豪)의 집으로 옮겨 나갔다. 명협정 에 앉았는데 구례현감(이원준)이 와서 봤다. 저녁에 체찰사가 현으로 들어왔다. 오후 네 시쯤에 소나기가 쏟아지더니 오후 여섯 시에 개었다.

5월 20일 [양력 7월 4일]<경술> 맑다.
저녁에 첨지 김경로(金敬老)가 와서 봤다. 또 말하기를 무주 장 박지리의 농토가 아주 좋다고 했다. 옥천에 사는 권치중(權致中) 은 첨지 김경로(金敬老)의 서처남(庶妻男)인데 옥천 양산창 근처 에 있다고 했다. 체찰사(李元翼)이 내가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공생(貢生)을 보내고 또 군관 이지각(李知覺)을 보내 더니 조금 있다가 또 군관을 보내어 조문하기를, "일찍 상을 당 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가 이제야 비로소 듣고 놀라 애도한다."고 하고, 저녁에 만날 수 있는가를 물었다. 나는 대답하기를 "저녁에 마땅히 가서 뵙겠다."고 했다. 어둘 무렵에 가서 뵈오니, 체찰사(李元翼)는 소복을 입고 접대한다. 조용히 일을 의논하고 체찰사(李元翼)가 개탄해 마지않았다. 밤이 깊도록 이야기하는 중에 일 찌기 임금의 분부가 있었는데 미안하다는 말이 많이 있었다는 바, 그 뜻을 알지 못하겠다고 하며, 또 흉물의 하 는 짓이 몹시도 그럴 듯하게 속이고 있음에도 하늘이 이를 살피 지 못하니 나랏일을 어찌할꼬! 나올 때에 남 종사(南從事)가 사람을 보내어 문안했다. 나는 밤이 깊어서 나가 인사하지 못한다고 대답해 보냈다.

5월 22일 [양력 7월 6일]<임자> 맑다. 마파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손인필(孫仁弼)의 부자가 와서 봤다. 박천 류해(柳海)가 승평으로 가서 그 길로 한산도로 간다 하므로, 전라·경상 두 수 사에게 와 가리포 첨사 등에게 문안 편지를 써 보냈다. 늦게 체찰사의 종사관 김광엽이 진주에서 이 구례현으로 들어오고 배흥 립(裵興立) 영감도 온다는 개인적인 편지도 왔다. 그 동안의 정 회를 풀 수 있겠다. 다행이다. 혼자 앉았으니 비통하여 견디기가 너무 어렵다. 어두울 무렵 배흥립(裵興立) 동지와 이 구례현감 이원춘(李元春)이 와서 봤다.

5월 23일 [양력 7월 7일]<계축>
아침에 정사룡(鄭士龍)·이사순(李士順)이 와서 봤다. 원공의 일 을 많이 전했다. 저녁나절에 동지 배흥립(裵興立)이 한산도로 돌아갔다. 체찰사(李元翼)가 사람을 보내어 부르므로 가서 뵙고 조용히 의논하는데, 시국의 그릇된 일에 대하여 많이 분개하고 다만 죽 을 날만 기다린다고 했다. 내일 초계로 간다고 하면서, 체찰사가 영수증을 주면서 이대백(李大伯)이 모은 쌀 두 섬을 모아서 이를 성밖 주인 장세휘(張世輝)의 집으로 보냈다.

5월 24일 [양력 7월 8일]<갑인> 맑다. 샛바람이 종일 세게 불었다.
아침에 광양의 고응명(高應明)의 아들 고언선(高彦善)이 와서 봤다. 한산도의 일을 많이 전한다. 체찰사가 군관 이지각(李知覺) 을 보내어 안부를 묻고, 경상우도의 연해안 지도를 그리고 싶으 나 도리가 없으니, 본 대로 지도를 그려 보내주면 고맙겠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거절할 수가 없어서 지도를 대강 그려서 보냈다. 저녁에 비가 많이 왔다.

6월 26일 [양력 8월 8일]<을유> 맑다.
새벽에 순천의 종 윤복(允福)이 현신하기에 곧 곤장을 쉰 대 때 렸다. 거제에서 온 사람이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중군장 이덕필(李德弼)과 변홍달(卞弘達)·심준(沈俊) 등이 와서 봤다. 종 사관 황여일(黃汝一)이 개벼루 강가의 정자로 갔다가 돌아갔다. 어응린(魚應 )과 박몽삼(朴夢三) 등이 와서 봤다. 아산 종 평세(平世)가 들어와서 어머니 영연이 평안하고, 집집이 위·아랫 사람들이 다 평안하다고 했다. 다만 석달이나 가물어서 농사는 틀려 가망이 없다는 것이다. 장삿날은 7월 27일이나 또는 8 월 4일중에서 날잡는다고 했다. 그리운 생각에 슬픈 정회를 어 찌 다 말하랴! 저녁에 우병마사(김응서)가 체찰사(李元翼) 에게, "아산의 이방(李昉)과 청주의 이희남(李喜男)이 복병하기 싫어서 원수(권율)의 진영 곁으로 피해 있다."고 말하여, 체찰사 가 원수에게 공문을 보내니, 원수는 무척 성내어 공문을 다시 작성하여 보냈다. 이 날에 작은 워라말이 죽어서 내다버렸다.

6월 27일 [양력 8월 9일]<병술> 맑다.
아침에 어응린(魚應 )·박몽삼(朴夢三) 등이 돌아갔다. 이 희남(李喜男)과 이방(李昉)이 체찰사의 행차가 도착하는 곳으로 갔다. 저녁나절에 황여일(黃汝一)이 와서 보고 한참동안 이야기하 였다. 오후 세시에 소나기가 많이 쏟아져 잠깐 사이에 물이 흘러 넘쳤다고 했다.

6월 30일 [양력 8월 12일]<기축> 맑다.
새벽에 정상명(鄭翔溟)을 시켜 체찰사에게 문안했다. 이 날 몹시 더워 땅이 찌는 듯했다. 저녁에 흥양의 신여량(申汝樑)·신제 운(申霽雲) 등이 와서, 연해의 땅은 비가 알맞게 왔다고 전했다.

7월 5일 [양력 8월 17일]<갑신> 비가 내렸다.
이른 아침에 초계원이 체찰사의 종사관 남이공(南以恭)이 경내를 지나간다고 하면서 산성에서부터 영문을 지나갔다. 저녁나절에 변덕수(卞德壽)가 왔다. 변존서(卞存緖)가 마흘방(馬訖坊)으로 갔다.

7월 14일 [양력 8월 26일]<계사> 맑다.
이른 아침에 정상명(鄭翔溟)과 종 평세(平世)·종 귀인(貴仁)이 짐말 두 필을 남해로 보냈다. 정(상명)은 싸움말(戰馬)을 끌고 올 일로 보낸 것이다. 새벽꿈에 나는 체찰사와 같이 어느 곳에 이르니, 송장들이 쫙 깔려 있었는데 혹은 밟기도 하고 혹은 목을 베게도 했다. 아침밥을 먹을 때 문인수가 와가채(모시조개 음식)와 동아선(동아를 기름에 볶아 잣가루를 묻혀 겨자를 찍어 먹는 술안주)을가져 왔다. 방응원(方應元)· 윤선각(尹先覺)· 현응진(玄應辰)· 홍우공(洪 禹功) 등과 함께 이야기했다. 홍이라는 사람은 제 아버지의 병으로 종군하고 싶지 않아 팔이 아프다고 핑계하니 엄청 놀랍다. 오전 열시쯤에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은 정인서(鄭仁恕)를 보내어 문안했다. 또 김해 사람으로 왜놈에게 부역했던 김억(金億)의 편지를 보이는 데, "초7일 왜선 오백 여 척이 부산에서 나오고, 초9일 왜선 천척이 합세하여 우리 수군과 절영도(부산시 영도구 영도) 앞 바다에서 싸웠는데, 우리 전선 다섯 척이 표류하여 두모포에 닿았고, 또 일곱 척은 간 곳이 없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곧 종사관 황여일(黃汝一) 이 군사 점호하는 곳으로 달려 나가서 황 종사관과 상의하였다. 그대로 앉아서 활 쏘는 것을 구경했다. 조금 있으니 내가 타고 간 말을 홍대방(洪大邦)더러 달려보라고 했더니 잘 달렸다. 날씨가 비올 것 같아 돌아와 집에 이르자마자 비가 마구 쏟아졌다. 밤 열시쯤에야 맑게 개이니 달빛이 낮보다 훨씬 더 밝았다. 쌓이는 그리움을 말할 수 없다.

7월 18일 [양력 8월 30일]<정유> 맑다.
새벽에 이덕필(李德弼)·변홍달(卞弘達)이 전하여 말하기를, "16일 새벽에 수군이 몰래 기습공격을 받아 통제사 원균(元 均)·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충청수사(최호) 및 여러 장수 와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었고, 수군이 대패했다."고 했다. 듣자하니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 조금 있으니, 원수(권율)가 와서 말하되, "일이 이 지경으로 된 이상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오전 열 시가 되어도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직접 연해안 지방으로 가서 보고 듣고 난 뒤에 이를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말하니, 원수가 기뻐하여 마지않았다. 나는 송대립(宋大立)·류황(柳滉)·윤선각(尹先覺)· 방응원(方應元)· 현응진(玄應辰)· 림영립(林英立)· 이원룡(李元龍)· 이희남(李喜男)· 홍우공(洪禹功)과 함께 길을 떠나 삼가현에 이르니, 삼가현감이 새로 부임하여 나를 기다렸다. 한치겸(韓致謙)도 왔다.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한치겸(韓致謙)은 한효순(韓孝純)의 셋째 자(子)

7월 24일 [양력 9월 5일]<계묘> 비가 그침없이 내렸다.
한치겸(韓致謙)·이안인(李安仁)이 부찰사(韓孝純)에게로 돌아갔다. 정씨의 종 예손과 손씨의 종이 같이 돌아갔다. 식사를 한 뒤에 이 홍훈(李弘勛)의 집으로 옮겼다. 방응원(方應元)이 정개산성에서 와서,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정개산성에 이르렀다"고 전하고, 연해안 사정을 듣고 본대로 전하더라는 것이다. 군량 스무 말, 말 먹이 콩 스무 말, 말 대갈 일곱 벌을 가져 왔다. 이 날 저녁에 조방장 배경남(裵慶男)이 와서 보기에 술로써 위로했다.

7월 27일 [양력 9월 8일]<병오> 종일 비가 내렸다.
이른 아침에 정개산성 건너편 손경례(孫景禮)의 집으로 옮겨 가서 머물렀다. 저녁나절에 동지 이천(李薦)과 판관 정제(鄭霽)가 체찰사에게서 와서 전령을 전했다. 같이 저녁밥을 먹었다. 이 동지는 배 조방장에게 가서 잤다.

7월 29일 [양력 9월 10일]<무신> 비가 오락가락 하다.
아침에 이군거(李君擧:薦의 字) 영감과 함께 밥을 먹고 체찰사 앞으로 보냈다. 저녁나절에 냇가로 나가 군사를 점검하고, 말을 달리는데, 원수가 보낸 자들은 모두 말도 없고 또 활과 화살도 없으니, 아무 쓸 데가 없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 저녁에 돌아올 때 배 동지와 남해현령 박대남(朴大男)에게 들려 봤다. 밤 내내 큰비가 왔다. 찰방 이시경(李蓍慶)에게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9월 27일 [양력 11월 6일]<을묘> 맑다.
송한(宋漢)·김국(金國)·배세춘(裵世春) 등이 승첩장계를 가지고 뱃길로 올라갔다. 정제(鄭霽)는 충청수사에게 부찰사(韓孝純)로 보낼 공문을 가지고 같이 같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밤 내내 아팠다.

「讀宋史」

(** 다음은 날짜는 적혀 있지 않으나, 1597년(정유)(Ⅰ) 10월 8일(乙丑) 뒷 장부터 모두 3 장으로 적혀 있는데 그 앞의 한 장은 「讀宋史」 이다.)
어허 이 때가 어느 때인데, 저 강(綱)은 가려고 하는가. 가면 또 어디로 가려는가. 무릇 신하된 자로서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요, 다른 길은 없다. 그 때야말로 종사의 위태함이 마치 터럭 한 가닥으로 천만 근을 달아 올림과 같아 정히 신하된 자는 몸을 버려 나라의 은혜를 갚을 때인데 이어서 간다는 말은 진실 로 마음에 생각도 내지 못할 말이거늘, 하물며 어찌 입 밖으로 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면 내가 강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까. 몸을 헐어 피로써 울며, 간담을 열어젖히고서 사세가 여기까지 왔으니 화친할 수 없음을 밝혀서 말할 것이요, 아무리 말하여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면 거기 이어 죽을 것이요, 또 그렇지도 못한 다면, 짐짓 화친하려는 계획을 따라 몸을 그 속에 던져 온갖 일 에 낱낱이 꾸려가며, 죽음 속에서 살 길을 구한다면, 혹시 만에 하나라도 나라를 건질 도리가 있게 될 것이어 늘, 강의 계획은 이 런 데서 내지 않고 그저 가려고만 했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된 자로서 몸을 던져 임금을 섬기는 의리라 할 수 있겠는가.

(** 다음은 위의 「독송사(讀宋史)」가 적힌 그 다음 장에 두 장으로 적혀 있는 것이다.)
새로 급제한 원경전(元景銓)·한치겸(韓致謙)·정복례(鄭福禮)는 우병사의 진에, 남엽(南曄)· 정재순(鄭在淳)· 조형(趙珩)· 조완(趙 琓)은 진주 운곡에, 이홍훈(李弘勛) 주인집은 송곡에, 창노의 우두 머리 봉환(鳳還)·석운(石雲)·뢰손(雷孫)은 백천 별장에, 훈련정 조신옥(趙信玉)· 홍대방(洪大邦)은 쌀 14·콩 18·파초 4·콩2 및 10, 대오미 2를, 흥양 정병 김득상(金得尙)은 화살쏘기로, 김덕방 (金德邦)·김윤복(金允福)은 처음 벼슬에 나왔고, 처음 벼슬에 나온 조언해(趙彦海)·주부 송상보(宋象甫)는 말이 없고, 순천 이진 (李珍)과 아산에서 처음 벼슬한 박윤희(朴允希)는 지금 충청도 방어사의 진중에 있는데 싸움 말이 있어 적을 죽일 수 있다고 한다.

12월 30일 [양력 2월 5일]<병술> 입춘. 눈보라가 몹시 휘날렸다.
□□□배 조방장이 와서 봤다. 여러 장수들이 와서 봤다. 평산 포만호·영등포만호는 오지 않았다. 부찰사(韓孝純)의 군관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오늘밤이 일년의 마지막 날이 되는 그믐밤이라 비통한 생각이 한결 더 하다.

무술년(戊戌年)(1598년) (韓孝純官職 - 湖南 湖西 監鐵糧餉總官使)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난중일기 기록 없음.

[자료 인터넷 참조]
[한효순(韓孝純)관련 요점정리 韓範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