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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이긍익[李肯翊, 1736∼1806]

< 연려실기술 : 별집 제8권, 연려실기술 제14권, 제19권, 제20권, 제21권, 제32권>

연려실기술 별집 제8권 [관직전고(官職典故)]

○ 선조조에 경흥(慶興) 녹둔도(鹿屯島)에서 백성을 모집하여 둔전(屯田)을 경작하였는데, 오랑캐가 쳐들어와 거의 다 살육해 버렸다. 임금이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녹둔도에서 전사한 장사를 애도한다 / 悼鹿屯島戰亡將士
는 어제(御題)를 내어 근시(近侍)하는 신하들에게 율시(律詩)를 짓도록 명하였다. 한준겸이 한림(翰林)으로서 그 시의 장원으로 뽑혔으니, 그 마지막 구에,
변방에서 아뢴 바는 본래 다 실상으로 믿기 어렵다 하나니 / 邊奏由來難盡實
구중 궁궐 속에서 어찌 다 알리오 이 사이의 원통한 일을 / 九重寧悉此問冤
하였다. 말 속에 은근히 풍자함이 있어 임금에게 고하는 체통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 《지봉유설》

○ 선조 기해년 4월에, 조정에서 바다를 방비하는 선박이 모두 쇠잔하여 못 쓰게 됐다 하여 남부 3도 내륙 지방의 기병ㆍ보병ㆍ팔결군(八結軍)으로 격군(格軍)을 충당케 하였다. 전라 감사 한효순(韓孝純)이 청하기를, “기병과 보병은 무명 5필을 바치고, 팔결군은 쌀 20두(斗)를 수영(水營)에 바치게 하여 주사(舟師)의 양곡 값으로 하자.”고 하였다. 《일월록》

연려실기술 제13권[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이이가 아뢰기를, “한 사람을 쓰고 버림이 큰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나, 다만 동과 서라는 말이 사라지지 않으면 사류가 서로 의심하고 꺼리게 됩니다. 지금 효원의 재주가 쓸 만한데도 동인ㆍ서인의 설에 견제되어서 쓰지 않는다면 심히 사류가 불안해하는 근본이 될 것입니다.” 하였으며, 유성룡ㆍ한효순(韓孝純)이 역시 반복하여 아뢰었으나, 상의 마음은 끝내 풀리지 않았다.

연려실기술 제14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 14일에 전라도 유생 정암수(丁巖壽) 등이 구언(求言)하는 명을 받들어 상소하여, 이산해(李山海)와 정언신 등이 전후에 국정을 그르치고 역적을 옹호하였음을 극언하였고, 또 한효순(韓孝純)ㆍ이정직(李廷直)ㆍ정개청(鄭介淸)ㆍ유종지(柳宗智)ㆍ유영립(柳永立)ㆍ유성룡(柳成龍)ㆍ이양원(李陽元)ㆍ윤의중(尹毅中)ㆍ윤탁연(尹卓然)ㆍ김응남(金應南)ㆍ송언신(宋言愼)ㆍ남언경(南彦經)ㆍ이언길(李彦吉)ㆍ조대중(曺大中)ㆍ이홍로(李弘老)ㆍ이순인(李純仁)ㆍ유몽정(柳蒙井)ㆍ김홍휘(金弘徽) 등의 죄를 말하였으며,전 현감 나사침(羅士忱)이 그 아들 덕명(德明)ㆍ덕준(德峻)ㆍ덕윤(德潤) 등과 같이 여립을 구원하려고 하여 오히려 역적을 고발한 자를 무고하였다고 한 것과, 과거보러 시험장에 들어가서 글을 대신 지어주고 여립과 귀속말을 했다는 것과, 또 덕명은 그 종제 덕현(德顯)ㆍ덕헌(德憲) 등과 많은 선비들에게 소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말하고, 또 정인홍(鄭仁弘)이 여립과 사이가 심히 좋아서 한몸같이 합하였다고 하고, 또 계미년에 삼사(三司)가 두어 현인(賢人 이이, 성혼)을 공박할 때에 그 중 사헌부의 한 사람이 전하의 몸이 편하지 못한 기색을 보고서, ‘공격하던 것을 정지하자.’고 발론하니, 홍여순(洪汝諄)이 말하기를, ‘이런 때를 당하였으니 사직이 더욱 중한 것이라. 했으니, 여순의 임금을 모르는 부도한 죄로 온 나라 사람들이 이를 갈고 있다.’고 조리가 없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 놓았다. 이것을 보고 임금이 크게 노하여 이산해와 유성룡을 불러서 위안하고 정암수 등 열 사람 박천정(朴天挺)ㆍ박대붕(朴大鵬)ㆍ임윤성(任尹聖)ㆍ김승서(金承緖)ㆍ양산룡(梁山龍)ㆍ이경남(李慶男)ㆍ김응회(金應會)ㆍ유사경(柳思敬)ㆍ유영(柳渶) 등 을 잡아서 옥에 가두게 하였다. 이어 임금이 이르기를, “너희들이 그렇게 자세히 알았으면 어찌 일찍이 와서 고변하지 못하였느냐.” 하였다.

연려실기술 제19권[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 처음에 이조판서 성영(成泳)이 영경의 당이라고 탄핵당하여 파직되자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이광정(李光庭)ㆍ김수(金晬)ㆍ이정귀(李廷龜)를 후임에 추천하였다. 임금이 망(望)을 더 내라고 명하므로, 신흠(申欽)을 천거하였으나 또 망을 더 내라고 명하였다. 임금은 정창연(鄭昌衍)에게 뜻을 둔 것이었고, 창연은 왕비의 외숙이었다. 원익은 부득이 김신원(金信元)ㆍ한효순(韓孝純) 및 창연을 추천하니 드디어 창연이 이조 판서가 되었는데 뭇 사람이 시끄럽게 의논하고 외척의 권세가 성하게 되었으나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하담록》

연려실기술 제20권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 병진년 가을부터 대비를 폐하자는 의논이 다시 성하게 일어나니 선조의 유교(遺敎)를 받은 일곱 신하의 말로서 자료를 삼았다. 서신(徐兟)ㆍ송문규(宋文奎) 등이 이이첨의 명령을 받아 서로 잇달아 소를 올려 죄 주기를 청하였고, 정조ㆍ윤인ㆍ유숙(柳潚) 등이 삼사를 나누어 차지하여 또 7신을 귀양 보내기를 계속 청하였다. 《명륜록》

○ 이때 임금이 대비를 폐하고자 하여 김제남을 추형(追刑)하여 시장(市場)에 시체를 들어 내놓았다. 한편 대사헌 남근(南瑾)ㆍ대사간 정조ㆍ부제학 유숙 등은 7신의 한 사람인 신흠(申欽) 등을 무함하여 귀양 보내었다. <상촌(象村)의 시장(諡狀)>

○ 박몽준(朴夢俊) 등의 소에, “전하께서는 어머니와 자식과의 은혜에 관련된 일을 감히 다른 사람이 의논할 수 없다 하여 여러 소를 예조에 내려 보냈으니 몹시 슬퍼하고 불안해하신 뜻이 말씀하지 않는 가운데 넘쳤습니다. 당당한 한 나라의 공론을 예조에서 어찌 감히 홀로 감당하겠습니까. 따라서 3대신을 보고 백관들과 수의(收議)하여 화근을 제거하도록 힘써 청하자는 예조의 의견이 매우 이치에 합당하니, 대신된 이도 빨리 조정의 벼슬아치를 거느리고 의거(義擧 대비(大妃)를 폐하는 것)를 행할 일로서 논해야 할 것입니다.대비를 내치는 일은 대신들이 행하고 전하께서는 조금도 이에 간여하지 않으시어 사사의 은혜를 보전하심이 정리(情理)와 예에 당연한 것입니다. 영의정 기자헌은 핑계만 대고 이를 결정하지 않으며,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은 우유부단하게 주위의 눈치만 보고 있으며, 원임 정창연(鄭昌衍)은 병을 핑계대고 일을 보살피지 않으면서 한 마디 말도 대답하지 않으니, 이는 모두 일을 전하께 미루고 저들은 일을 먼저 주도했다는 비난을 면하려 하는 계책입니다.” 하였다.

○ 10월 8일에 유학 윤유겸(尹惟謙)이 소를 올려, “지난해에 이경전(李慶全)ㆍ이각이 의기가 분발하여 화근을 제거해야 된다는 의논을 주창하고, 그 다음에 박승종ㆍ유희분ㆍ이이첨 세 사람이 마음과 힘을 같이 하여 나라의 어려움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큰 일이 거의 성취되려 했는데 이론(異論)이 횡행하여 중대한 의논을 맨 먼저 꺼낸 이경전이 화를 두려워하여 도리어 물러서서 회피하려는 말이 있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의지하고 믿는 사람은 대신인데, 기자헌은 임금을 버리고 간 죄를 졌으며, 한효순은 악인과 편당 지은 자취가 있는데도 전하께서 이를 용서하고 형벌을 가하지 않느 것은 그들이 나라의 은혜를 후하게 입었으니 반드시 화근을 제거하여 공을 세울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 우의정 한효순이 휴가를 청하는 원서(願書)를 제출하고 강가로 나가자 이이첨도 휴가를 청하는 원서를 제출하였는데 임금은 그들을 불러 모두 일을 보게 하였다. 《일월록》
이때 한효순은 거의 죽게 된 나이로서 겨우 목숨이 붙어 있는 형편이었는데 이이첨의 문전에서 굽신거려서 정승의 관직을 얻더니 이첨의 명을 받들어 개와 파리처럼 더럽게 행동하므로 사람들은 이 사람이 반드시 큰일을 저지를 것이라고 하였다. 《청백당기사(淸白堂記事)》

○ 여러 역적들이 날마다 무뢰한을 모아 아주 패리(悖理)한 욕과 극히 참혹한 말을 가르쳐, 번갈아 올리는 일이 갈수록 심한데도 광해주는 그것을 당연하다고 보고 용납하였다. 그러나 대비를 폐하여 내쫓는 일만은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는 이 일을 담당할 상신(相臣)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적신(賊臣)들이 한효순은 종처럼 부릴 수 있는 자 인줄 알았기 때문에 그에게 정승의 명칭을 빌려주어서 집밖에서는 여러 역적을 시켜 그를 협박하고 집안에서는 그의 사나운 처를 시켜 졸라대었다. 《사옹만록(思翁漫錄)》

○ 사인(舍人) 유충립(柳忠立)이 봉해 내린 유생의 소 아홉 통을 초저녁에 영의정 기자헌에게 가지고 가서 전하니, “지금은 이미 날이 저물었을 뿐만 아니라 대신이 먼저 의견을 드려야 될 것이니 우의정에게 가서 전하라.” 하였다. 곧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의 처소에 가니 효순이 대답하기를, “지금 병으로 휴가를 청하고 있는 중이므로 정신이 흐려서 감히 열어볼 수 없다.” 하였다. 또 이 뜻을 영의정에게 회보(回報)하니 영의정은,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과 봉래(蓬萊 정창연(鄭昌衍))도 모두 대신의 반열에 있으니 낭청(郞廳)을 시켜 가서 의논하게 하고, 좌의정에게도 한 통을 등사해서 보내야 한다.” 하였다. 《명륜록》

○ 23일에 영의정 기자헌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은 본래 배운 것이 없는 사람으로서 마침 인재가 모자라는 시기를 당하여 의정부의 자리를 채웠는데, 이제 신이 만약 주장하여 대비를 폐한다면 국사(國史)에 ‘아무개가 함부로 대비를 폐했다’고 기록되어, 신만이 만세의 공의(公議)에 죄를 얻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성조(聖朝)의 수치가 될 것입니다. 전일에 대간이 전하와 대비는 따로 거처해야 된다는 의논을 하다가 또한 관직을 삭탈 당함을 면하지 못했는데 만약 뒷날에 지금의 이런(대비를 폐하는) 일로서 혹시 신들을 죄 주자고 청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때는 전하께서도 반드시 용서해 주지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영부사(領府事) 이항복(李恒福)과 좌의정 정인홍(鄭仁弘)이 밖에 있고, 전 우의정 정창연은 문을 닫고 나오지 않으며,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은 병으로 휴가를 청하고 나오지 않은 지가 몇 날이 되어 신만이 서울에 있사온데, 이처럼 막중막대한 일을 어찌 혼자서 처리하겠습니까.

○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의 의논은, “조정의 의논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오직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를 다할 뿐입니다.” 하였다.
유학 이국광(李國光)ㆍ서의중(徐義中)ㆍ황정필(黃廷弼) 등은 소를 올려 기자헌ㆍ한효순(韓孝純)ㆍ김세렴ㆍ이항복ㆍ박홍구(朴弘耈)ㆍ민형남(閔馨男)ㆍ정홍익 등을 빨리 삼사의 청에 따라 처형할 것을 말했으며 또 역적 토벌할 일을 청하였다. 유학 박극(朴極)은 소를 올려 수의할 때에 이의를 말한 사람을 목 베도록 청하였다.

○ 대비를 폐하자는 의논이 이미 발론된 후에 서울과 지방이 크게 요동하였다. 한효순(韓孝純)이 사람을 보내어 정인홍에게 계책을 물었더니 그 말이 알쏭달쏭하여 분명하지 않으면서 뜻은 폐위(廢位)와 삭출(削黜)의 중간에 있었다. 한효순이 날마다 이이첨의 뜻을 엿보아 정청(庭請)할 기일을 여러 번 바꾸어 앞당겼다 늦추었다 하였다. 3일 신시에, 백관이 물결처럼 빨리 대궐로 나아가니 길 가는 사람들이 놀라서 실색하였다. 여러 소가 일어난 후로부터 사대부들이 강개하고 통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혹은 분노하여 팔을 휘두르는 사람도 있더니 이때에 와서는 바람에 쓰러지듯이 폐하자는 의논에 따라갔다. 이에 따르는 사람이 많아져서 도리어 따르지 않는 사람을 공격하기를, “나는 때에 따라 변통하는 권도(權道)를 아는데 따르지 않다가 재화를 만나게 되는 것은 망녕일 뿐이다.” 하였다. 조정에 모이라는 명이 처음에 대신에게서 나가지 않았는데, 우참찬 유간(柳澗)이 이이첨의 집에서 바로 의정부의 하리(下吏)를 불러 영을 내리니, 우의정 한효순이 어찌할 줄을 모르고 빨리 걸어오는데 뒤뚱거리는 모습이 마치 늙은 개의 형상과 같았다. 《청백당기사》

○ 4일, 햇무리가 서고 지진이 있었다. 우의정 한효순이 백관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서궁이 화란을 쌓아온 것은 고금에 없는 일입니다. 이에 열 가지 죄를 들추어내어 그 대개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 한효순이 대궐 뜰에 나아가서 정인홍의 글로써 단안(斷案)을 삼아 드디어 폐자ㆍ삭자 [廢削] 두 글자로써 목표를 삼고, 여러 경재(卿宰)를 불러 앞에 나오게 해서 각기 가(可)자와 부(否)자를 쓰라고 하니 자리에 있는 사람이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역적 김개(金闓)가 제자리에서 나와 큰 소리로, “이 일을 어찌 물을 수 있습니까. 따르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따르지 않은 사람의 의논을 따를 것입니까.” 하고 부르짖으니 한효순은 감히 어찌할 수 없으므로 잠잠히 머리만 수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청백당기사》

○ 조정이 떠들썩해지고 곧 흩어져 나가려는 기색이 있었는데 밤은 벌써 사경이었다. 이이첨이 노하여, “이것은 나라의 큰일인데 주저하는 사람이 있으면 신하가 아니다.” 하고, 큰 소리를 질렀다. 이이첨이 계초(啓草)를 지으면서 바로 폐출이라는 말로 글을 만드니 유희분이 큰 소리로 모든 정청(庭請)은 으레 영의정의 의논을 따르는 법입니다. 내암(萊菴 정인홍(鄭仁弘))이 이미 서궁에게 조알(朝謁)을 거두어 치우고 분사(分司)를 폐지하기로 의논을 하였으니 다만 이것으로 글을 만들 것이요, 만약 이 의논으로써 불가하다고 한다면 마땅히 먼저 영의정을 죄주고 그 후에 그 글을 고침이 좋겠습니다.” 하여, 두 정승이 서로 다투어 밤이 되어서도 결정이 나지 않았다. 한효순이 조정에서 모임을 갖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여 이이첨의 뜻에 굽혀 복종하여 마침 폐출로써 계초에 썼다. 파하고 나니 닭이 벌써 울었다. 《북천록》

○ 12일, 유학 윤로(尹魯)의 소에, “한효순이 지연시키면서 즉시 대의를 거행하지 않은 죄를 먼저 다스리고, 다음에는 삼사가 한효순을 비호해 준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다.

○ 기자헌이 탄핵되어 떠난 후에는 한효순이 모후를 유폐시키는 일을 홀로 담당하였다. 수의부터 정청에 이르기까지 일언반구도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반드시 이이첨에게 물은 후에 행하였다. 우윤 김개(金闓)가 중간에서 말을 대신 전달했는데, 매양 사람을 만나면 김 우윤(金右尹)이 무슨 말을 하더냐고 물었다. 《동리소설(東里小說)》

○ 좌의정 한효순, 우의정 민몽룡(閔夢龍), 좌찬성 박승종(朴承宗), 우찬성 이충(李冲) 우참찬 유간(柳澗) 사인(舍人) 유충립(柳忠立)ㆍ정광경(鄭廣敬), 검상(檢詳) 남궁경(南宮㯳), 사록(司錄) 옥진휘(玉晉輝),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 이광정(李光庭), 한평군(韓平君) 이경전(李慶全), 완창군(完昌君) 이각(李覮), 봉산군(蓬山君) 정상철(鄭象哲), 길천군(吉川君) 권반(權盼), 풍안군(豐安君) 임곤(任袞), 한흥군(漢興君) 조공근(趙公瑾), 한산군(漢山君) 조진(趙振), 한남군(漢南君) 이필영(李必榮), 영성군(靈城君) 신경행(辛景行), 영평군(鈴平君) 윤중삼(尹重三), 완산군(完山君) 이순경(李順慶), 완숭군(完崇君) 이이경(李頤慶), 청릉군(淸陵君) 김신국(金藎國), 여양군(驪陽君) 민인백(閔仁伯), 석흥군(碩興君) 이척(李惕), 하청군(河淸君) 정희현(鄭希玄), 원양군(原陽君) 송강(宋康), 해신군(海愼君) 이희령(李希齡), 익흥군(益興君) 이응순(李應順), 문평군(文平君) 유공량(柳公亮), 석룡군(石龍君) 전룡(全龍), 충훈도사(忠勳都事) 심일명(沈日明), 충익도사(忠翊都事) 엄혜(嚴譓), 판돈녕(判敦寧) 민형남(閔馨男), 도정(都正) 이형욱(李馨郁), 첨정(僉正) 강수곤(姜秀昆), 주부(主簿) 이명백(李明白), 참봉 이몽룡(李夢龍), 판중추(判中樞) 노직(盧稷), 지사(知事) 박홍구(朴弘耈)ㆍ표정로(表廷老), 동지(同知) 장만(張晩)ㆍ박정현(朴鼎賢)ㆍ심열(沈悅)ㆍ박자흥(朴自興)ㆍ이응(李膺)ㆍ장예충(張禮忠)ㆍ방의남(方義男), 첨지(僉知) 한총(韓叢), 도승지 유황(柳璜), 경력(經歷) 이사수(李士修), 도사(都事) 박영(朴瑛), 지사(知事) 한희길(韓希吉), 전흥군(全興君) 이시언(李時彦) 등과 호위(扈衛)한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 일선위(一善尉) 김극빈(金克鑌), 길성위(吉城尉) 권대임(權大任),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 의빈도사(儀賓都事) 이국형(李國衡), 이조참판 유몽인(柳蒙寅), 참의(參議) 유희발(柳希發), 정랑(正郞) 이중계(李重繼)ㆍ윤이지(尹履之)ㆍ김적(金適) 안경심(安景深), 좌랑 윤형철(尹衡哲)ㆍ이지정(李志定)ㆍ정지경(鄭志經)ㆍ홍득일(洪得一), 예조판서 이이첨(李爾瞻), 참판 윤수민(尹壽民), 참의 이명남(李命男), 정랑 안경(安璥)ㆍ채겸길(蔡謙吉)ㆍ최호(崔濩), 좌랑 유약(柳瀹)ㆍ조정생(曺廷生)ㆍ한정국(韓定國), 병조판서 유희분(柳希奮), 참판 이덕형(李德泂), 분참판(分參判) 이성길(李成吉)ㆍ김지남(金止男), 참의 정립(鄭岦), 분참의(分參議) 박사제(朴思齊), 참지(參知) 이원엽(李元燁), 정랑 유진증(兪晉曾)ㆍ이용진(李用晉)ㆍ오윤해(吳允諧), 분정랑(分正郞) 박률(朴慄), 좌랑 김시국(金蓍國)ㆍ강선여(姜善餘)ㆍ유엽(柳鞾)ㆍ조길(曺佶)ㆍ이사맹(李師孟), 형조판서 조정(趙挺), 참의 정규(鄭逵), 정랑 홍여일(洪汝一)ㆍ이응천(李應天)ㆍ박광선(朴光善)ㆍ신득연(申得淵)ㆍ나인(羅紉)ㆍ권고(權●), 좌랑 민정(閔瀞)ㆍ남이민(南以敏)ㆍ박수의(朴守誼)ㆍ최진운(崔振雲), 공조판서 이상의(李尙毅), 참판 조탁(曺倬), 참의 장자호(張自好), 정랑 윤정지(尹廷之)ㆍ최탁(崔琢)ㆍ박조(朴簉), 좌랑 이명한(李明漢)ㆍ김덕망(金德望)ㆍ경선(慶選), 판윤(判尹) 윤선(尹銑), 좌윤(左尹) 김개(金闓), 우윤(右尹) 이원(李瑗), 서윤(庶尹) 윤희(尹僖), 판관(判官) 신수신(愼守身), 참군(參軍) 홍유형(洪有炯)ㆍ김명응(金命應)ㆍ이종립(李宗立), 대사헌 조존세(趙存世) 삼사(三司)ㆍ승지ㆍ한림(翰林)과 주서(注書)는 들어가지 않았다. 판결사(判決事) 박경신(朴慶新),사의(司儀) 김경열(金景悅), 사평(司評) 황립중(黃立中)ㆍ신경진(申景進), 사성(司成) 민호(閔頀), 사예(司藝) 이창정(李昌庭)ㆍ신충일(申忠一), 직강(直講) 채승선(蔡承先)ㆍ유광(柳洸)ㆍ이숙(李潚)ㆍ윤지양(尹知養), 전적(典籍) 한윤겸(韓允謙)ㆍ황상겸(黃尙謙)ㆍ신식(申栻)ㆍ한급(韓昅)ㆍ홍경찬(洪景纘)ㆍ양시헌(梁時獻)ㆍ이강(李茳), 박사(博士) 오전(吳晪)ㆍ권준(權濬)ㆍ박진(朴瑨), 학정(學正) 이유일(李惟一)ㆍ허돈(許暾)ㆍ조훈(趙塤)ㆍ한정국(韓正國), 판교(判校) 이유록(李綏祿), 교검(校檢) 이경현(李景賢), 정자(正字) 홍헌(洪憲)ㆍ심지청(沈之淸)ㆍ김언(金琂)ㆍ박안효(朴安孝)ㆍ정심(鄭沁)ㆍ유집(柳潗), 좌통례(左通禮) 김위남(金偉男), 우통례(右通禮) 금개(琴愷), 상례(相禮) 강홍중(姜弘重), 찬의(贊儀) 유영(柳泳), 인의(引儀) 홍사준(洪師浚)ㆍ조차마(曺次磨)ㆍ유경춘(柳擎春)ㆍ이유(李瑜)ㆍ정연주(鄭兗岫)ㆍ유식(柳湜)ㆍ한사성(韓師聖)ㆍ이흠(李欽)ㆍ윤취빙(尹就聘)ㆍ이정건(李廷楗)ㆍ임취빙(林就聘)ㆍ김복흥(金復興)ㆍ박자원(朴自元)ㆍ가인의(假引儀) 임충좌(任忠佐)ㆍ신준(申俊)ㆍ이승안(李承安)ㆍ장인서(張麟瑞)ㆍ곽계문(郭繼文), 종부정(宗簿正) 유탁(兪濯), 주부(主簿) 서탁(徐晫), 전적(典籍) 남이성(南以聖), 장악정(掌樂正) 이홍엽(李弘燁), 첨정(僉正) 정대해(鄭大海), 주부(主簿) 민주(閔澍), 직장(直長) 최원호(崔元祜)ㆍ허항(許恒), 사도정(司導正) 이시립(李時立), 첨정(僉正) 조계한(趙繼韓), 주부 김우성(金佑成)ㆍ정섭(鄭涉), 사옹정(司饔正) 정문진(鄭文振), 주부 성흔(成忻), 직장 박문엽(朴文燁)ㆍ유윤창(柳允昌)ㆍ박승안(朴承安), 봉사(奉事) 이쟁(李崝)ㆍ유여성(柳汝惺)ㆍ정진(鄭晉)ㆍ이사민(李師閔)ㆍ참봉 심정익(沈廷翼), 상의정(尙衣正) 정도(鄭道), 판관(判官) 이승헌(李承憲), 주부(主簿) 안언길(安彦吉), 별좌(別座) 박효전(朴孝全) 혹은 황효전(黃孝全)이라고 한다. 박안행(朴安行)ㆍ임광준(任光俊)ㆍ황식(黃湜), 직장(直長) 구해(具海), 사복정(司僕正) 황익중(黃益中), 첨정(僉正) 유박(柳舶), 판관(判官) 유희안(柳希安), 주부 한덕윤(韓德允)ㆍ성창렬(成昌烈), 내섬정(內贍正) 이순민(李舜民), 주부 김연경(金延慶), 봉사 최명선(崔命善), 봉상정(奉常正) 이시정(李時楨), 첨정(僉正) 차운로(車雲輅), 판관 조익(趙釴), 주부 박희현(朴希賢)ㆍ강문익(康文翼)ㆍ왕보신(王輔臣), 봉사 김경후(金慶厚), 참봉 김지수(金地粹), 내자정(內資正) 금변(琴忭), 주부 황진(黃津), 봉사 윤성득(尹誠得), 예빈정(禮賓正) 윤정(尹綎), 주부 정사온(鄭思溫), 별좌(別座) 권필중(權必中)ㆍ윤형임(尹衡任), 직장 이준익(李俊翼), 참봉 이격(李格), 제용정(濟用正) 박효생(朴孝生), 판관(判官) 김현(金俔), 직장 박찬(朴燦)ㆍ박현(朴睍), 봉사 조탁(趙倬), 참봉 정문해(鄭文海), 군기정(軍器正) 강린(姜繗), 부정(副正) 정응정(鄭應正)ㆍ한여징(韓汝澂)ㆍ조수헌(趙守憲), 판관 윤간(尹侃)ㆍ이두망(李斗望), 주부 심이(沈怡)ㆍ윤호(尹昈), 직장 임천수(任天壽), 봉사 이응립(李應立)ㆍ고경서(高景瑞), 참봉 정환(鄭煥), 군자정(軍資正) 유효립(柳孝立), 판관(判官) 윤흥충(尹興忠), 주부 정종길(鄭宗吉)ㆍ김영(金韺), 봉사 이준(李浚), 사재정(司宰正) 송극인(宋克訒), 첨정(僉正) 박천서(朴天敍), 주부 강세경(姜世慶)ㆍ직장 이경민(李慶閔), 참봉 정심(鄭諶)ㆍ사섬정(司贍正) 유철(柳澈), 주부 이탁(李倬), 직장 한여현(韓汝賢), 봉사 민선철(閔善哲),참봉 한사일(韓師一)ㆍ사포주부(司圃主簿) 윤홍업(尹弘業), 별좌(別座) 이경준(李慶俊)ㆍ김형윤(金亨胤), 장원별좌(掌苑別座) 임성로(任星老)ㆍ김호(金灝), 평시령(平市令) 이원현(李元顯), 직장 이사증(李師曾)ㆍ조지별좌(造紙別座) 김수정(金守正), 금화별좌(禁火別座) 한오(韓晤), 전생주부(典牲主簿) 박안국(朴安國), 봉사 신종근(申從謹), 참봉 이호(李護), 사축별좌(司蓄別座) 송탁(宋鐸)ㆍ이정신(李廷臣)ㆍ박수형(朴隨亨), 상서직장(尙瑞直長) 최응하(崔應河), 의영주부(義盈主簿) 남궁격(南宮格), 직장 한순(韓㫬), 봉사 허련(許璉), 빙고별좌(氷庫別座) 조심(趙諶)ㆍ임경후(任慶後), 교서교리(校書校理) 정흡(鄭洽), 저작(著作) 이유성(李惟聖), 종묘령(宗廟令) 우정침(禹廷琛), 직장 김효달(金孝達), 봉사 이호직(李好直)ㆍ최홍서(崔弘緖), 사직참봉(社稷參奉) 유노증(兪魯曾), 조국준(趙國俊), 전설별좌(典設別座) 민익(閔榏)ㆍ김숙(金橚)ㆍ심숙(沈俶)ㆍ신득의(愼得義), 와서별좌(瓦署別座) 이진영(李晉英), 활인별좌(活人別座) 심훤(沈暄)ㆍ이사성(李士星)ㆍ정항(鄭恒), 귀후별좌(歸厚別座) 장흔(張昕)ㆍ안정(安鋌), 선공첨정(繕工僉正) 이정익(李廷益), 직장 심돈(沈暾), 봉사 신순(申楯)ㆍ이응명(李應溟), 참봉 이유후(李裕後), 감역(監役) 임석후(任碩後)ㆍ김영구(金永耈)ㆍ홍형(洪逈)ㆍ우시계(禹時啓)ㆍ이경(李㯳)ㆍ이국광(李國光), 풍저주부(豐儲主簿) 하진(河鎭), 직장 최응두(崔應斗), 장흥주부(長興主簿) 우대유(禹大有), 직장 윤인계(尹仁啓), 봉사 김광국(金光國), 광흥수(廣興守) 정근(鄭瑾), 주부 한사덕(韓師德), 봉사 정문승(鄭文升)ㆍ채계선(蔡繼先), 금부도사(禁府都事) 이숭의(李崇義)ㆍ정찬(鄭纘), 전옥주부(典獄主簿) 이순(李楯), 오부주부(五部主簿) 유세증(兪世曾)ㆍ유건(柳鍵), 참봉 윤홍보(尹弘輔)ㆍ구현(具鉉)ㆍ윤보형(尹保衡)ㆍ성대수(成大受)ㆍ김원(金瑗), 동몽교관(童蒙敎官) 정운서(鄭雲瑞)ㆍ이성석(李聖錫)ㆍ이영의(李榮義)ㆍ최기문(崔起門)ㆍ최구(崔衢)ㆍ이중명(李重溟), 내시교관(內侍敎官) 윤상민(尹商民)ㆍ이일형(李日馨), 훈련교관(訓鍊敎官) 최응문(崔應雯), 사산감역(四山監役) 윤형준(尹衡俊)ㆍ유지호(柳之豪)ㆍ김철(金哲)ㆍ신억(申億) 이민수(李敏樹), 도총경력(都摠經歷) 이응린(李應麟)ㆍ이동룡(李東龍)ㆍ강작(康綽)ㆍ변언황(邊彦璜), 분경력(分經歷) 이득가(李得可), 도사(都事) 한기영(韓耆英)ㆍ정국정(鄭國楨) 한창(韓㻛)ㆍ채색(蔡穡)ㆍ박성(朴成)ㆍ박영(朴瑛), 훈련도정(訓鍊都正) 유승서(柳承緖)ㆍ훈련정 이충선(李忠善) 부정(副正) 이우철(李友哲)ㆍ허정식(許廷式), 첨정(僉正) 이대득(李大得)ㆍ최보(崔葆), 판관(判官) 심대항(沈大恒)ㆍ방경복(房景福), 주부 이정언(李廷彦)ㆍ정직(鄭稷), 참봉 배경(裵璟)ㆍ최두(崔㞳)ㆍ봉사 한응복(韓應福)ㆍ이석남(李碩男), 선전관(宣傳官) 이중광(李重光)ㆍ이종선(李宗善)ㆍ이곽(李郭)ㆍ이종(李悰)ㆍ정원필(鄭元弼)ㆍ신유(辛曘)ㆍ조종의(趙宗義)ㆍ조정영(曺挺英)ㆍ이경하(李景夏)ㆍ이탁(李倬)ㆍ성언길(成彦吉)ㆍ백대진(白大進)ㆍ박곤원(朴坤元)ㆍ박명룡(朴命龍)ㆍ유종립(柳宗立)ㆍ신채(申蔡), 익위(翊衛) 박일현(朴逸賢)ㆍ이언직(李彦直)ㆍ이평형(李平亨), 사어(司禦) 신수천(愼守天)ㆍ최환(崔煥), 익찬(翊贊) 유정립(柳鼎立)ㆍ조성(趙誠), 위솔(衛率) 이운근(李雲根), 부솔(副率) 조실구(曺實久)ㆍ이호원(李浩源), 시직(侍直) 김수관(金守寬)ㆍ이석망(李碩望), 세마(洗馬) 유시립(柳時立)ㆍ조각(趙珏)ㆍ황길남(黃吉男), 호군(護軍) 이위경(李偉卿)ㆍ유경종(柳慶宗)ㆍ조유도(趙有道)ㆍ정광성(鄭光成)ㆍ유지신(柳止信)ㆍ한덕수(韓德修)ㆍ여인길(呂裀吉)ㆍ유응형(柳應泂)ㆍ최윤조(崔胤祖)ㆍ윤의(尹顗)ㆍ이여검(李汝儉)ㆍ성이문(成以文)ㆍ김정간(金廷幹)ㆍ이득원(李得元)ㆍ이국(李掬)ㆍ이응린(李應麟)ㆍ박서(朴瑞)ㆍ박적(朴寂)ㆍ이여해(李汝諧), 사직(司直) 남근(南瑾)ㆍ송석경(宋錫慶)ㆍ이대엽(李大燁)ㆍ여우길(呂祐吉)ㆍ윤휘(尹暉)ㆍ민형(閔泂) 박이서(朴彝敍)ㆍ송안정(宋安廷)ㆍ이선복(李善復)ㆍ이경황(李慶滉)ㆍ안륵(安玏)ㆍ우치적(禹致績)ㆍ원유남(元裕男)ㆍ변응지(邊應祉)ㆍ원근(元瑾)ㆍ이백복(李百福)ㆍ조유정(趙惟精)ㆍ이문전(李文荃)ㆍ오정방(吳定邦)ㆍ오순무(吳舜懋)ㆍ정문부(鄭文孚)ㆍ이구징(李久徵)ㆍ윤의립(尹毅立)ㆍ조경진(趙景禛)ㆍ김응함(金應緘)ㆍ구인경(具仁慶)ㆍ박봉수(朴鳳壽)ㆍ박덕린(朴德麟)ㆍ원수남(元秀男)ㆍ조흥남(趙興男)ㆍ이현(李玹)ㆍ김윤신(金允信)ㆍ이은종(李殷宗)ㆍ정응운(鄭應運)ㆍ조명(趙溟)ㆍ구덕령(具德齡)ㆍ이충길(李忠吉)ㆍ김경서(金景瑞), 사과(司果) 송석조(宋錫祚)ㆍ정진철(鄭震哲)ㆍ조훤(趙暄)ㆍ황이중(黃履中)ㆍ이영남(李英男)ㆍ조충일(趙忠一)ㆍ강홍업(姜弘業)ㆍ김응하(金應河)ㆍ박난수(朴蘭秀)ㆍ이정생(李挺生)ㆍ김수겸(金守謙)ㆍ이시호(李時豪)ㆍ유태첨(柳泰瞻)ㆍ유옥(柳沃)ㆍ고경민(高敬民)ㆍ박지진(朴知晉)ㆍ김원복(金元福)ㆍ노세준(盧世俊)ㆍ윤경기(尹慶祺)ㆍ안용(安容)ㆍ조희보(趙希輔)ㆍ권복길(權復吉)ㆍ안호인(安好仁)ㆍ이식립(李植立)ㆍ홍대방(洪大邦)ㆍ유몽룡(劉夢龍)ㆍ박자(朴梓)ㆍ권사공(權士恭)ㆍ이인귀(李麟貴)ㆍ전윤(田潤)ㆍ이경호(李景瑚)ㆍ홍기남(洪奇男)ㆍ이굉(李鍧)ㆍ한준(韓俊)ㆍ이승형(李升亨)ㆍ심륜(沈惀)ㆍ전효신(全孝信)ㆍ최위(崔㬙)ㆍ박성룡(朴成龍)ㆍ윤안국(尹安國)ㆍ이귀경(李龜慶)ㆍ허완(許完)ㆍ이성(李晟)ㆍ황치성(黃致成)ㆍ조발(趙撥)ㆍ강침(姜沈)ㆍ유창문(柳昌文)ㆍ조국빈(趙國賓)ㆍ유림(柳琳)ㆍ권흡(權洽)ㆍ정침(鄭沈)ㆍ윤기헌(尹耆獻)ㆍ김운성(金雲成)ㆍ조준남(趙俊男)ㆍ남궁인(南宮戭)ㆍ황락(黃洛)ㆍ김전(金銓)ㆍ이일원(李一元)ㆍ성식(成軾)ㆍ민종량(閔宗亮)ㆍ방천수(方天壽)ㆍ전유형(全有亨)ㆍ정지륜(鄭之倫)ㆍ임석훈(林碩熏)ㆍ이겸(李馦)ㆍ강선(姜璿)ㆍ이분(李芬)ㆍ권형(權)ㆍ최숭(崔崇)ㆍ민항(閔沆)ㆍ홍창세(洪昌世)ㆍ이복형(李福亨)ㆍ장명응(張明應)ㆍ이중길(李重吉)ㆍ남빈(南贇)ㆍ이대남(李大男)ㆍ안몽윤(安夢尹)ㆍ정승조(鄭承曹)ㆍ정대립(鄭大立)ㆍ조굉중(趙宏中)ㆍ안홍망(安弘望)ㆍ이응망(李應望)ㆍ이유서(李惟恕)ㆍ박기남(朴奇男)ㆍ권근(權瑾)ㆍ이종성(李宗誠)ㆍ김영(金穎)ㆍ성시헌(成時憲)ㆍ송진(宋震)ㆍ조옥건(趙玉乾)ㆍ최한(崔漢)ㆍ유대일(兪大逸)ㆍ윤인남(尹仁男)ㆍ신경류(申景柳)ㆍ김경의(金景義)ㆍ정양(鄭暘)ㆍ허상(許詳)ㆍ김경운(金慶雲)ㆍ이문창(李文昌)ㆍ김원남(金元男)ㆍ정지한(鄭之罕)ㆍ김유형(金有馨)ㆍ신득자(申得滋)ㆍ권응원(權應元)ㆍ홍걸(洪傑)ㆍ신인민(愼仁民)ㆍ이복광(李復匡)ㆍ한천두(韓天斗)ㆍ이덕부(李德符)ㆍ홍택(洪澤)ㆍ이욱(李●)ㆍ이정(李楨)ㆍ최경춘(崔景春)ㆍ홍용해(洪龍海)ㆍ한현인(韓顯仁)ㆍ권로(權櫓)ㆍ이신의(李愼儀)ㆍ안숙도(安肅道)ㆍ한항길(韓恒吉)ㆍ조광필(趙光弼)ㆍ권엽(權燁)ㆍ조천종(曺天宗)ㆍ김명남(金命男)ㆍ신용휴(申用休), 사정(司正) 변응항(邊應恒)ㆍ허함(許涵)ㆍ성희구(成僖●)ㆍ오숙(吳䎘), 사맹(司猛) 박경범(朴景範)ㆍ홍찬(洪粲)ㆍ홍여량(洪汝亮), 사용(司勇) 최숙(崔璹)ㆍ이고(李稿)ㆍ이의춘(李宜春)ㆍ김여정(金汝頲)ㆍ신극제(申克濟)ㆍ양두남(梁斗南)ㆍ이숙(李淑)ㆍ황덕영(黃德韺), 훈련낭청(訓鍊郞廳) 이중광(李重光)ㆍ이영달(李英達). 《명륜록》

○ 이항복은 정청이 이미 끝나고 대비의 존호(尊號)를 버리고 서궁으로 일컬으라는 전교가 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였다. “요새 나라에서 역적 다스리기를 자못 엄하게 하나 모두 형적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 이 대비를 폐하자고 청하는 무리들은 실상 대역인 것이다. 내가 사귀는 친구 중에도 정청에 참여한 사람이 많이 있으니 매우 한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옆에 모시고 있던 자가 묻기를, “아무개 아무개는 모두 공의 가장 친한 사람이오니 뒷날에 서로 만나게 되면 그들을 어떻게 대우하렵니까.” 하니 공은, “그들은 모두 협박을 받아 따라간 것이니 그 정상은 비록 불쌍하나 이미 반역에 참여했으니 교분은 벌써 끊어졌다. 뒷날에 만나면 그저 범연히 서로 대할 뿐이다.” 하였다. 《북천록》

○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인원을 초계하여 아뢰었는데, 그 중에 있는 경양군(慶陽君) 이사공(李士恭)ㆍ사과(司果) 이계남(李桂男)ㆍ사맹(司猛) 이상준(李尙俊)ㆍ사과 윤홍(尹鴻) 등의 아들은, 그 아버지가 정청에 참여하였는데 불참이라 하는 것은 원통하다고 하여 소를 바쳤다. 사과 조석명(趙錫明)ㆍ임위(任瑋)는 날마다 참여하였는데 불참한 초계(抄啓)에 섞여 들어갔으므로 소를 올려 스스로 변명하였다. 《명륜록》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

의창군(義昌君) 광(珖)은 선왕의 아들들이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뽐내며 앞장을 설 때 혼자서 시종 정청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종반(宗班) 30여 명이 참여하지 않았다. 영돈녕(領敦寧) 정창연(鄭昌衍),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 유근(柳根),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 모두 수의(收議)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진창군(晉昌君) 강인(姜絪), 청풍군(淸風君) 김권(金權), 능해군(綾海君) 구성(具宬), 복천군(福泉君) 오백령(吳百齡), 송산군(松山君) 김위(金渭), 풍녕군(豐寧君) 조응록(趙應祿), 판중추(判中樞) 이정귀(李廷龜), 지중추(知中樞) 김상용(金尙容)ㆍ신식(申湜), 지돈녕(知敦寧) 박안세(朴安世), 동돈녕(同敦寧) 김현성(金玄成), 첨지중추 오윤겸(吳允謙),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수의(收議)에 참여하지 않았다. 진안위(晉安尉) 유적(柳頔), 당원위(唐原尉) 홍우경(洪友敬),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 두 사람은 합계(合啓) 중에 들어갔다. 호군(護軍) 이시언(李時彦)ㆍ이시발(李時發)ㆍ성진선(成晉善)ㆍ윤응삼(尹應三), 사직(司直)ㆍ김유(金瑬)ㆍ권희(權憘)ㆍ송영구(宋英耈)ㆍ정효성(鄭孝誠)ㆍ이경직(李景稷)ㆍ사과(司果) 박동선(朴東善)ㆍ사용(司勇) 권극정(權克正)ㆍ이담(李憺)ㆍ정사서(鄭思恕)ㆍ유정생(劉挺生)ㆍ정호신(鄭虎臣)ㆍ정승서(鄭承緖)ㆍ이상(李祥)ㆍ병조정랑 정홍좌(鄭弘佐)ㆍ전적(典籍) 박자응(朴自凝),승문정자(承文正字) 강석기(姜碩期), 내섬주부(內贍主簿) 민여현(閔汝賢), 풍저봉사(豐儲奉事) 정충전(鄭忠傳), 전생참봉(典牲參奉) 유산립(柳山立)ㆍ전옥참봉(典獄參奉) 안홍중(安弘重), 위솔(衛率) 유찬(柳澯), 의장낭청(儀仗郞廳) 정상조(鄭象祖)ㆍ이홍원(李弘源) 등이 참여하지 아니하였다. 《명륜록》

유학 최성(崔晟)은 소를 올려 먼저 조경기(趙慶起)ㆍ정온(鄭蘊) 등을 목베고 다음은 김세렴이 그의 장인 유희발(柳希發)의 사주(使嗾)대로 정론을 방해하고, 기자헌ㆍ이항복이 임금을 배반하고 나라를 저버린 죄를 가지고 모두 목 베기를 청하였다.

연려실기술 제20권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폐위 삭출의 절목(節目)
무오년 2월 4일에, 서궁을 폐출할 일이 폐삭(廢削)으로 결정되었으므로 정계(停啓)하고, 종묘에 고하는 한편 교지를 반포한다는 방문(榜文)을 의정부에서 포고하였다. 《명륜록》

○ 11일에 빈청(賓廳)에서 합의하여 좌의정 한효순(韓孝純), 공조판서 이상의(李尙毅), 예조판서 이이첨(李爾瞻),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이경전(李慶全), 우찬성 이충(李冲), 호조판서 최관(崔瓘), 대사헌 남근(南瑾), 공조참판 조위(曺偉), 병조참의 정립(鄭岦), 부제학 정조(鄭造), 예조참의 이명남(李命男), 예조참판 윤수민(尹壽民), 병조참판 이덕형(李德泂), 형조참판 박자흥(朴自興), 호조참의 정규(鄭逵), 대사간 윤인(尹訒), 호조참판 경섬(慶暹) 등이 같이 참여하여 절목(節目)을 의논해 정하였는데, 명륜록에는 17원(員)이라 했는데, 청백당(淸白堂)은 최관(崔瓘)이 의논해 정했다고 한다. “앞서 올렸던 본국의 존호를 깎아버리고, 옥책(玉冊)과 옥보(玉寶)를 내놓고 대비란 두 글자를 버리고 서궁(西宮)이라 일컫게 하고, 국혼(國婚)할 때 가져온 납징(納徵) 납폐(納幣) 등의 문서를 도로 돌려보내, 어보(御寶)를 내놓으며, 휘지(徽旨)의 표신(標信)을 내놓고 여연(輿輦)의 의장(儀仗)을 내놓게 한다. 조알(朝謁)과 문안(問安)과 숙배(肅拜)를 폐지하고, 분사(分司)의 승정원ㆍ병조(兵曹)ㆍ도총부(都摠府)ㆍ겸춘추관(兼春秋館)ㆍ사옹원(司饔院)ㆍ승전색(承傳色)ㆍ사약(司鑰)ㆍ별감(別監)ㆍ내관(內官)과 궁중의 각 차비(差備)ㆍ나인(內人)ㆍ위장소(衛將所)ㆍ내의원(內醫院)ㆍ금루(禁漏)ㆍ주방(酒房)을 폐지한다. 공물(貢物)의 상납을 폐지케 하되 각 도에서 매달 진상하는 것과 삼명일(三名日)에 진상하는 것과, 의정부ㆍ육조(六曹)에서 공급하는 물선(物膳)과, 의정부의 안팎 각 관사에서 3일마다 공상(供上)하는 것을 폐지한다. 서궁에 공급하는 것은 후궁의 예에 따르고 공주의 늠료(廩料)와 혼인의 격식은 옹주의 예에 따르게 한다. 아버지가 역적의 괴수가 되고 자신은 반역 모의에 참여하고 자식은 역적의 무리에게 추대되어 이미 스스로 종묘와 인연을 끊었으니 죽은 후에는 온 나라의 모든 사람이 곡하지 않고 상복도 입지 않으며 종묘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궁의 담을 더 높이 쌓고, 2품의 군관(軍官) 4인과 문관 종사관 2인과 군관 4인과 당상관 무장(武將) 8인과 무군관(武軍官) 8인이 서로 번갈아 맡아서 지키게 하되 맡아 지키는 군사와 보장(堡障) 설치할 곳은 병조로 하여금 보아 살펴서 참작하여 결정하게 하고, 환관 2인과 별감 4인을 두게 한다.” 하였다. 《명륜록》

○ 좌의정 한효순(韓孝純)이 아뢰기를, “다시 이상의(李尙毅) 등과 의논 하였던바 모두 공주의 칭호를 낮추었으니 늠료와 혼인은 당초에 이미 정해진 의논에 의거하여 그대로 시행함이 마땅하니, 감히 부표(付標 참고할 책이나 문서에 표시하기 위하여 책장 속에 표를 붙이는 것을 말함)하여 아룁니다.” 하였다. 《명륜록》

연려실기술 제21권[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 16일에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이 2품 이상의 관원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지난  번에 대간이 합계한 기준격이 반역을 고발한 것과 허균이 자기변명을 한 상소는 모두 아주 중대한 일이므로 끝내 덮어둘 수 없는 것이지만, 지금은 대론(大論)이 한창 일어나는 시기여서 다른 일은 돌아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제 성균관 유생들이 소를 올려 아뢴 바에 의하여 이미 흉서 사건을 대궐 뜰에서 국문하게 되었으니, 전일 사헌부의 장계에 의거하여 기준격과 허균을 아울러 국문하여 사실을 캐어 법대로 다스리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이때 성균관의 소로써 원계(元簋) 등을 잡아 와서 국문했기 때문이다.

연려실기술 제21권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 이조 판서 한효순(韓孝純)은 매부 신경희가 국문을 당하기에 사직하려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연려실기술 제21권 [광해조(光海朝)의 상신(相臣)]

한효순(韓孝純)
한효순은, 자는 면숙(勉叔)이며, 호는 월탄(月灘)이요, 관은 청주(淸州)이다. 영의정 상경(尙敬)의 6대 손으로 좌찬성(左贊成) 계희(繼禧)의 현손(玄孫)이며, 군수 여필(汝弼)의 아들이다. 계묘년에 태어나서 무진년에 진사가 되고 병자년에 문과에 뽑혔다. 이첨에게 아첨하여 이조(吏曹)를 독차지 하고 있었고, 병진년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무오년에 백관을 거느리고 폐모(廢母)를 정청(庭請)하였고, 신유년에 죽었는데 인조반정 후에 관작을 추탈 당하였다.

○ 계미년(1583 선조16)에 옥당이 되어 자못 동론(東論)을 주장하다가 영해 부사(寧海附使)로 나갔다. 임진년 난리를 만나 왜적이 영해를 침범하니, 효순이 군관 배산립(裵山立) 등을 시켜 병사를 매복시켰다가 요격하여 물리쳤다. 이보다 먼저 좌감사(左監司) 김성일(金誠一)이 미처 조정의 임명을 받기 전에 특지(特旨)로서 효순을 당상관에 올리고 토포사(討捕使)를 겸하게 하여 적을 토벌하는 일을 맡겼다. 길이 막혀서 유서가 이르지 못해서 효순을 좌감사로 올렸는데, 이는 영남 유생들이 상소하여 김성일(金誠一)이 우도감사(右道監司)로 머물러 있기를 청했기 때문이다. 《산서일기(山西日記)》 《조야첨재(朝野僉載)》. 아래도 이와 같다.

○ 효순이 좌감사가 된 후로는 항상 자주색 도포를 입고 나각(鑼角)을 울리며 감사의 위의(威儀)를 성대하게 베풀어서, 각 고을에 주둔한 왜적이 성에 올라 가리키며 바라보아도 효순은 태연히 겁내는 기색이 없었다. 이에 사람들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말하기를, “한(漢) 나라 관리의 위의(威儀)를 다시 보겠구나.” 하였으며, 이 때문에 도로가 비로소 통하였다.

○ 함창 당교(咸昌唐橋)에 있던 왜적이 좌ㆍ우도(左右道)의 요해지를 점령하고 그 세력이 심히 성하였기 때문에 효순은 안동에 나가 주둔하고 병사 박진(朴晉),우후(虞侯) 권응수(權應銖),밀양 부사 이수일(李守一) 및 의병장 정대임(鄭大任) 등은 모두 안동과 예천 등지에 모이는 한편 효순이 이수일을 대장으로 삼아 만호(萬戶) 민정홍(閔廷鴻) 등을 거느리고 용궁(龍宮)을 지키게 하였다. 또 안동 부사 우복룡(禹伏龍)을 도지휘사(都指揮使)로 삼아 예천에 진을 치고 정예군사 2천 명을 뽑아 응수(應銖)에게 주어 기회를 틈타 밤에 습격하게 하고, 스스로 십여 고을을 군사와 말을 거느리고 의성(義城)ㆍ안덕(安德) 등지에 주둔하여 인동(仁同)에 있는 왜적을 엿보았다. 병신년에 김륵(金玏)을 대신하여 부찰사(副察使)가 되었다.

○ 병신년(1596 선조 29) 12월에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장계에 의하여, 효순이 명을 받아 해군의 일을 전적으로 관할하고 삼도 수군(三道水軍)의 격군(格軍 뱃사공의 일 도와주는 사람)과 군량을 주야로 조발(調發)해서 보내는 동시에 병선과 기계를 급히 수선하게 하여 이순신이 적을 방어하는 일을 도왔다.

○ 무신년(1608) 이후로 이첨이 집권하자 효순은 이첨에 붙어서 이조를 독차지 하였으며, 병신년에 정승이 된 것은 산삼(山蔘)을 임금에게 바쳐서 된 것이다. 이에 그때 어떤 사람이 시를 지었는데,
산삼 정승을 사람들이 다투어 사모하고 / 山蔘閣老人爭慕
잡채 상서의 세력을 당할 이가 없도다 / 雜采尙書勢莫當
하였는데, 상서는 이충흠(李忠欽)을 가르킨 것으로서 잡채를 드려서 호조 판서를 얻었기 때문이다.《일사기문》

○ 효순이 계해년 반정한 때에 관직이 삭탈 당하자 형조 판서 서성(徐渻)이 아뢰기를, “효순은 대신으로서 육조의 각사(各司)에 첩(帖)을 내려서 백관들을 강제로 거느리고 대궐 뜰에 엎드려 모후(母后)를 폐위하도록 청하였습니다. 옛 역사를 살펴 보건대, 비록 어둡고 어지러운 때에도 이 같은 일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효순의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니, 인조가, “이 사람은 이미 죽어서 형벌을 추가할 수 없으니 어떻게 처결할 것인가?” 하였다. 이에 서성이, 형벌을 추가할 수 없으나, 법을 따라 그 아들에게 죄를 내림이 마땅합니다.” 하니, 인조가 곧 윤허하여 효순의 세 아들을 중도부처(中道付處)시켰다.

연려실기술 제32권 숙종조 고사본말(肅宗朝故事本末)

○ 진사 한용명(韓用明)이 한효순(韓孝純)의 증손 윤헌을 배척하고 허목과 이옥을 위하여 변명하는 소를 올렸는데, 그 소의 대략에, “윤헌의 소장 끝부분에 남곤과 심정 같은 무리를 조정에 발탁하여 중책을 위임하였다고 한 것은 오늘의 삼공(三公)을 가리켜서 한 말입니다. 지금 우상 허목은 맨 먼저 종통을 붙들어서 나라에 공이 있고, 또 노직(老職) 첨지로부터 네 번 벼슬을 거쳐 정승에 올랐으니, 전하가 이 노인을 취한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남곤과 심정이란 간사한 소인의 욕을 당하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보고 계시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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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번역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