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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석설연지도(耆碩設宴之圖)                                             


耆老會의 모습


沈喜壽(1548-1622)의 贊文


( 鄭仁弘‚ 韓孝純‚ 趙振‚ 李準 등 4명 불참)


기석설연(耆碩設宴)참석자명단

본문(本文)                                                          심희수 [沈喜壽, 1548 ~ 1622]찬  

1621년에 베풀어진 耆老會의 모습을 담은 그림과 심희수가 撰한 贊文‚ 참여자의 座目 등으로 구성된 작품. 그림의 크기는 87.6× 52.7Cm이나 이보다 컸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윗 부분과 오른쪽에도 그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어느 시기엔가 잘려나간 흔적이 뚜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림 밑 부분에 쓰여진 沈喜壽(1548-1622)의 贊文은 그의 문집인 ≪一松先生文集≫에도 실려있어 두 글을 대조할 수 있는데 대략 4-5줄 분량이 절단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심희수가 쓴 찬문 끝에는 ‘天啓元年辛酉 冬至前一日(卽初八月)靺線老拙靑城沈喜壽謹稿’의 款識가 적혀 있어 그림의 제작연대는 1621년임을 알 수 있다. 그림의 원래 제목은 심희수의 문집에도 보이듯이 <耆英會圖>였음이 확실하나 후대에 들어와 누군가가 족자의 뒷면에 <기석설연지도>라는 제목을 쓴 것으로 보인다. 심희수의 자는 伯懼‚ 호는 一松‚ 본관은 靑松이다. 仁順王后의 從弟로서 盧守愼에게 학문을 배웠다. 선조 대에 좌찬성‚ 우찬성‚ 우의정 등을 지냈으며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는 좌의정에 올랐다. 문집으로는 ≪一松集≫이 있다. 계회도 형식의 그림은 모임이 끝난 후 이를 기념하여 참석자 수대로 그려서 각각 보관하여 후대까지 널리 전승하였는데 본 그림은 심희수의 贊文이 있는 것으로 보아 沈喜壽家에서 전해 온 것으로 판단된다. 그림을 보면 耆老會 모임은 실내에서 열리고 있다. 契員들의 모습은 그림의 윗부분과 우측면이 잘려나간 까닭에 왼쪽의 末席에 앉아 있는 두 사람만 보일뿐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왼편의 두 인물은 虎皮를 깔고 앉아 있고 앞에는 음식상을 받아들고 있다. 음식상에는 총 13개의 접시가 보인다. 실내의 문쪽에는 노랑색 겉옷과 붉은 치마를 착용한 여인들이 앉아 있거나 음식을 나르는 모습이다. 실내의 오른편에는 朱漆 탁자위에 꽂 가지를 꽂은 靑華白磁大花甁 두 개가 놓여있어 모임의 격조를 높이고 있다. 그림의 하단부 방 밖의 마루에는 가야금 또는 거문고(3명)‚ 해금(1명)‚ 피리(3명)‚ 장고(1명)‚ 북(2명)‚ 박(1명) 등의 악기를 연주하는 樂工들의 모습이 힘차게 표현되어 있고‚ 건물의 왼쪽 구석 벽에는 놋화로에 술을 덥히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림의 자료들은 계회도의 구체적인 모습과 함께 17세기초 樂工이나 妓女의 복식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된다. 전반적으로 인물 중심의 契會圖로서 모임 장면을 강조하여 표현한 조선중기 계회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그림의 하단에는 심희수가 쓴 서문과 세 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 역시 우측면이 잘려나가 완전한 상태는 아니다. 그런데 심희수의 문집인 ≪一松集≫ 권4에 실려있는 <耆英會詩並序>가 본 자료 하단의 글과 꼭 같은 내용이어서 원문 그대로의 모습은 복원할 수 있다. 다만 <耆英會詩竝序>에는 두 편의 시가 실린데 비해 본 자료에는 한 편의 시가 더 실려 있다. 座目에 의거하면 본 耆英會의 구성원은 총 13명이었으나 序文에 의하면 鄭仁弘‚ 韓孝純‚ 趙振‚ 李準 등 4명은 불참했음이 나타난다. 좌목에 기록된 명단은 沈喜壽(1548-1622)‚ 鄭仁弘(1535-1623)‚ 鄭昌衍(1552 -1636)‚ 韓孝純(1543-1621)‚ 朴弘耈 (1552-1624)‚ 趙挺(1551-1636)‚ 李光庭(1552-1627)‚ 柳根(1549-1627)‚ 李準(1545-1624)‚ 趙振(1543-?)‚ 申湜 (1551-1623)‚ 南瑾(1552-?)‚ 閔仁伯 (1552-1626) 등으로 대부분 광해군대에 정국의 핵심에서 활약했던 인물들이다. 1621년을 기준하면 정인홍이 87세로 최고령이며‚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도 70세가 된 인물로 耆英會가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좌목에는 기영회 구성원들의 성명‚ 관직‚ 생년‚ 본관‚ 字號‚ 사마시와 문과의 登第年 등 기초적인 인적사항이 실려있다.耆老들의 모임은 원래 중국에서 유래하였다. 당나라 때 白居易가 조직한 九老會가 있었으며‚ 송나라 때 文彦博과 司馬光을 비롯한 13인이 조직한 耆英會가 있었다. 본 작품의 원래 제목이 ‘耆英會詩並序’이고 13명이 참여한 것으로 보아 宋의 耆英會에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崔儻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海東耆英會를 조직한 것이 시초이며‚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의 이념 실천과 관련하여 특히 노인을 공경하고 우대하는 조처들이 널리 베풀어지면서 耆老會도 보다 활성화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經國大典≫에 규정된 내용만 하더라도 일년에 두 번 士大夫와 庶人에게 養老宴을 베풀었으며‚ 70이 되어 致仕하는 宰臣들에게 几杖을 하사하였다. 또한 정 2품 이상의 문관 實職者로서 70세 이상된 자들의 모임인 耆老所가 있었다. 왕이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만든 ≪耆社契帖≫(숙종)과 ≪耆社慶會帖≫(영조)이 만들어졌으며‚ 高官들의 기로회 모습은 개인의 문집에서 散見되고 있다. 권근의 <陽村集> <後耆英會序>에는 李居易의 건의로 1404년 기로회를 설치한 기록이 있으며‚ 본 작품의 소재인 沈喜壽의 <耆英會詩序>를 비롯하여‚ 金堉(1580-1658)의 <耆老所題名記>(1654년)‚ 柳根(1549-1627)의 <李元翼賜几杖宴序>와 같은 기로회 관련 자료들이 있다. 특히 왕이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한 기사계첩은 최고의 화원들이 상세하게 기로회의 잔치 모습과 함께 배행하는 사신들의 행렬‚ 백성들이 구경하는 모습 등을 담았기 때문에 당시의 생활사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강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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