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 묘비명(箕子廟碑銘)

해설 역문

宣德 3年 戊申年(무신년 세종 10年 단기3761, 서기 1428) 여름 4月 甲子(갑자) 일에 國王(국왕) 전하가 傳旨(전지)를 내려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 周(주)나라 武王(무왕)이 殷(은)나라를 정벌해 이기고, 殷(은)나라의 太師(태사)를 우리나라에 封(봉)하여 그가 周(주)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으려는 뜻을 이루게 하였다. 우리나라의 文物(문물)과 禮樂(예악)을 중국과 같이 비길 수 있음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2000여년이 된다. 이것은 오직 箕子(기자)의 가르침에 힘입은 것이다. 돌아 보건데 그의 祠字(사당)은 좁고 누추하여 쳐다보며 구부리기에 알맞지 않다. 우리 父王(부왕)께서 일찍이 重修(중수)하기를 命(명)하였고 내가 그 뜻을 받들어 독려하였다. 이제 落成(낙성)을 告하였으니 마땅히 돌에 새겨서 오래도록 後世(후세)에 보여야겠다. 史臣은 그 글을 지으라"하셨다. 臣 季良(계량)은 명을 받고 삼가고 두려워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한다. 臣(신)이 그윽히 생각하오니 孔子(공자)는 文王(문왕)과 箕子(기자)를 易經 明夷卦(역경 명이괘)의 象辭(상사)에서 열거하였으며, 또 3인(微子(미자), 箕子(기자), 比子(비자)를 일컬음)으로 일컬었으니 箕子(기자)의 德(덕)은 너무 커서 칭찬할 수도 없다. 옛날 夏禹氏(하우씨)가 홍수와 토지를 다스리니 하늘이 洪範(홍범)을 내려주셔서 떳떳한 彛倫(도리)가 베풀어 졌다. 그러나 그 말은 일찍이 虞(우)나라나 夏(하)나라의 글에는 한번도 보이지 않았고 천 여년이 지나고 箕子(기자)에 이르러 비로서 발설되었다. 그 때에 箕子(기자)가 武王(무왕)을 위하여 진술하지 않았다면 洛書(낙서)의 하늘과 사람에 관계된 學文(학문)을 후인들이 어디에서 알겠는가. 箕子(기자)가 斯道(사도)에 有功(유공)한 것이 어찌 연한 일이겠는가. 箕子(기자)는 武王(무왕)의 스승이다. 武王(무왕)이 그를 다른 곳에 봉하지 않고 우리 조선에 봉하였으므로 조선인들이 아침저녁으로 친히 箕子(기자)의 敎化(교화)를 받아 君子(군자)는 큰 道(도)의 요점을 얻어 들을 수 있고 백성들은 至治(지치)의 은택을 입을 수 있어서 그 교화는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는데 까지 이르렀다. 이것이 하늘이 우리나라를 厚(후)하게 하여 어질고 착한 이를 주어 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음이니 사람의 힘이 미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井田(정전)의 제도와 八條(팔조)의 법이 밝히기가 해와 별 같아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대로 그의 가르침에 복종하여 천년 뒤에도 그 당시에 있던 것과 같아서 楸然(추연)히 우러러 볼 때 저절로 사모함을 마지 못하는 바가 있다. 우리 恭定王(공정왕)께서는 총명하여 古事(고사)를 常考(상고)하고 經書(경서)와 史記(사기)를 즐겨 보았으며,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낸 지혜롭고 어진 자질로서 성인의 학문에 밝아서 洪範九疇(홍범구주)의 道(도)에 대하여 정신으로 會通(회통)하고 마음에 融合(융합)함이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恭定王(공정왕)은 시작하시고 우리 전하는 이어 닦아서 箕子(기자)에게 德(덕)을 높이고 功(공)을 보답하는 禮(예)를 이룬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니 실로 前代(전대)의 君王(군왕)들이 얻어 짝할 수  없는 바이다. 卿士(경사)와 庶民(서민)들이 서로 이끌고 일어나서 이에 따르고 이를 행하여 하늘의 밝은 빛에 가까워 져서 그 펴주신 복에 참여함을 얻은 것이 의심이 없으니 아, 장하시도다. 무릇 집을 지은 것이 약간 있고 거기에 소속된 田地(전지)를 두어서 瓷盛(나라의 大祭에 쓰는 기장과 피)을 제공하게 하고, 復戶(다른 노역을 면제해 주는 것)를 시켜 청소에 응하게 하였으며, 府尹(부윤)에게 명하여 享祠(향사)를 삼가 받들게 하였으니 廟宮(묘궁)의 일은 대체로 유감됨이 없다. 臣 季良(계량)은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며, 삼가 손을 들어 읍하고 머리를 조아려 銘(명)을 올리도다. "아, 箕子(기자)는 文王(문왕)의 무리로 하여서 아름다운 홍범이 上帝(상제) 훈계를 펼쳤네. 殷(은)나라 스승만이 아니라 진실로 武王(무왕)에게 스승이었네. 殷(은)나라는 그를 버려 멸망했고 周(주)나라는 그를 찾아 創盛(창성)하였네. 위대하다, 천하의 안전과 위태함이 그 몸에 매었는데 거두어 東(동)쪽으로 오셨음은 하늘이 우리를 偏愛(편애)함일세. 가르치고 다스림에 그 법은 여덟조목, 우매한 자 뉘 아니 밝아지며, 유(유는 陰,,즉 소인의 道)한 자 뉘 아니 剛(강은 陽, 즉 군자의 道)해 졌으랴. 길에서는 흘린 것을 줍지 않는다고 漢書(한서)에서 칭찬하고, 東夷(동이)로 하여금 中華(중화)같게 하였다고 唐(당)나라에 碑(비)가 서 있네. 열심히 힘쓰시는 우리 임금 끊긴 學文(학문)을 빛나게 이었네. 마음은 그 이치에 契合(계합)하고 몸으로는 그의 法을 실천하시네. 아버지 지으시고 아드님 이어시니 사당집 의젓하여 날아갈 듯 솟았네. 높다란 그 마루에 箕子(기자)의 神(신)을 奉安(봉안)하고 歲時(세시)로 享祀(향사) 올려 공경하고 치성하네. 아, 小臣(소신)은 끼친 글에 潛心(잠심)했더니, 이제 王命(왕명)을 받들고 머리 조아려 銘(명)을 쓰노니 盛大(성대)한 德(덕)이 광채로워 억만년 길이 빛나리" 하였다.

卞季良  撰(변계량 찬;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