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숙공 휘 악(思肅公 諱 渥)

 

유사(遺事) 사적(史蹟)(高麗史列傳)

<原文> 麗史列傳曰韓渥忠宣王時拜右代言忠肅立授選部典書知密直司事元詔王入朝渥從之時藩王暠冀유(兪+見: 넘겨볼 유)王位讒구(이해못할)百端渥以奇謀脫王于禍功在一等賜鐵券圖形壁上封上黨府院君賜宣力佐理功臣號累遷贊成事忠惠初進中贊及卒諡思肅後配享忠惠廟庭性謹愼有器局每事必三思而後行稍解蒙漢語子大淳公義仲禮公衍方信大淳官至知都僉議司事忠定末貶爲機張監務公義封淸城君諡平簡中禮官至政堂文學封繼城君公衍覺星大禪師方信官至贊成事封西原君

 

<역문해설> 고려사열전에 이르기를 한악은 忠宣王(충선왕) 때에 벼슬이 右大言(우대언)이 되었고忠肅王(충숙왕) 때에 選部典書(선부전서)를 역임하고 知密直司事(지밀직사사)에 승진되었다.충숙왕이 元(중국 원나라)나라 황제의 入朝(입조)하라는 부름을 받고 원나라에 들어가는데악이 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때 瀋(심)왕 暠(고)가 부당한 허욕에서 왕위를 넘겨다 보고여러 가지 허구를 꾸며 헐뜯고 비방하여 왕을 괴롭히는지라 渥(악)이 탁월한 지혜와 기발한 책모로 간계를 막아내고 왕을 위기에서 탈출케 한 공훈으로 一等功臣(일등공신)의 鐵拳(훈패)를 하사하고壁上(벽상)에 圓形(벽상)하고 上黨府院君(상당부원군)으로 책봉하고 宣力左理功臣號(선력좌리공신호)를 하사하였다.벼슬이 여러차례 승진하여 贊成事(찬성사)에 이르렀고 忠惠王(충혜왕) 초기에 中贊(중찬)이 되었고 下世(하세)한 후에는 思肅(사숙)의 諡號(시호)를 주고 忠惠廟庭(충혜묘정)에 配享(배향)되었다.

公은 천성이 근엄하고 신중하며 대인으로서의 器局(기국)을 갖추어매사를 반드시 세 번 생각해 본 후에야 시행하였고 몽고어나 중국어에도 도통하였다 한다.아들은 大淳(대순), 公義(공의), 中禮(중례), 公衍(공연), 方信(방신)이니大淳(대순)은 知都僉議司事(지도첨의사사)를 역임하였으나 忠定王(충정왕) 말기에는 機張監務(기장감무)로 좌천되기도 하였다.公義(공의)는 淸城君(청성군)에 冊封(책봉)되고 諡號(시호)는 平簡(평간)이요,中禮(중례)는 벼슬이 政堂文學(정당문학)으로 繼城君(계성군)에 책봉되고,公衍(공연)은 覺星大禪師(각성대선사)이며,方信(방신)은 벼슬이 贊成事(찬성사)로 西原君(서원군)에 책봉되었다.

<註>思肅公(사숙공)께서는 7男을 두셨는데 고려사에는 5男만이 전하여 있고6男 公瑞(공서): 登科 不仕(등과 불사: 과거에 등과하였으나 벼슬을 하지 않음))7남 方道(방도): 推忠協贊功臣 匡靖大夫 西海道副元師 諡忠靖(추충협찬공신 광정대부 서해도부원사 시충정) 墓所(묘소): 公의 墓所(묘소)는 長湍郡 東道面 細川(장단군 동도면 세천, 속칭 가극곡) 西坐卯向(서좌묘향)에 자리하고 있으며, 옛날부터 表石(표석)이 있었는데 端宗(단종)2년(甲戌 단기 3787, 서기 1454년)에 玄孫(현손) 右議政 確(우의정 확)등이 短碣(단갈)을 改竪(개수)하였다. 그 후 언제부터인지 년대는 알 수 없으나 오랫동안 失護(실호)되어 오다가효종3년 (壬辰 단기3985, 서기1652년)에 후손 碩中(석중)이 求山(구산)하기 위하여 각처의 山地(산지)를 舜行(순행)하다가 墓碣(묘갈)을 발견하게 되어 잃었던 산소를 다시 찾아 改封築 하였다.그러나 石物(석물)도 구비하지 못하고 관리와 수호가 소홀하였더니순조 4년(甲子 단기4137, 서기1804년)에 후손 光燮(광섭), 興裕(흥유)가 여러 宗人들과 合力하여新碣(신갈), 床石(상석), 望柱(망주)를 갖추어 건립하고 영역을 개봉축하였다.墓域(묘역)을 改修(개수)하던 당시에 誌石(지석)이 출토되었는데石面(석면)에 돌비늘이 거칠게 일어나고 때가 묻었을 뿐 아니라 일하던 연장에 찍히고 긁혀서파손된 곳이 많았으나 다행히 귀중한 증거가 될 만한 文字(문자)가 남아있었다.즉, 誌文(지문)에"公諱渥字子布自號誠齋至正二年五月十三日卒年六十九 (공휘악자자포자호성제지정이년오월십삼일졸연육십구)"라는 文字(문자)와 下段(하단)에"有後娶正尹宋某女生四男皆幼(유후취정윤송모여생사남계유)"라는문자가 분명하므로 諱字(휘자) 號(호)는 思肅公(사숙공)을 지칭함은 물론이거니와卒及(졸급) 享秊(향년)은 公이 고려 원종15년 (甲戌 단기3607 서기1274년)에 태어나시고충혜왕 3년(壬午 단기3675, 서기1342년)에 돌아가심을 명시하였고 또 後配宋氏(후배송씨)는正尹(정윤) 宋某(송모)의 딸인데 4男을 출생하였다는 사실이다.

前後(전후) 족보에서 아직까지 보지 못한 信蹟(신적)을 오백년 후에 밝힌 것을 흔쾌히 생각하며,그 전말을 譜版(보판)에 수록한다.

사숙공 표석음기(思肅公 表石陰記)

長子知都僉議大淳次子淸城君公義次子繼城君中禮次子大禪師覺星次子政堂文學方信景泰五年甲戌二月 日

 

<역문해설> 장남 지도첨의 대순, 차남 청성군 공의, 3남 계성군 중례, 4남 각성대선사 공연,5남 정당문학 방신 경태 5년(갑술년 이조 단종 2년 단기3787 서기1454년) 2월 5대손 우의정 확, 부사 서룡, 현사 려, 봉교 서봉, 승 서구6대손 소윤 명회, 녹사 명진, 교리 계희, 사직 계선, 대호군 종손 등이 이 비를 세운다.

 

사숙공 위토명세(思肅公 位土明細 )

土地所在地

地番

地目

地積

長湍郡 長道面 沙是里

(장단군 장도면 사시리)

849

255坪

854

260坪

855

155坪

857

260坪 

134

1町 4反 6畝

135

4町 3反 6畝 

175

13町 9畝

136

1町 1反 1畝

174

6町 5反畝

長湍郡 長道面 下里

(장단군 장도면 하리)

10

8町 5反 9畝

12

5町 2反畝

14

1町 6反 9畝

 

사숙공 묘비명(思肅公墓碑銘)

 

<역문해설> 우리 선조 高麗朝(고려조)의 右政丞(우정승)이며上黨府院君(상당부원군)이신 思肅公(사숙공)의 諱(휘)는 渥(악)이요 字(자)는 子布(자포)요.號(호)는 誠齋(성재)니 청주한씨이시다.

始祖(시조)는 太威公 韓 蘭(태위공 한 란)이시고曾祖(증조)는 禮賓卿 諱 光胤(예빈경 휘 광윤)이시고祖(조)는 中贊修文殿 太學士(중찬수문전태학사)文惠公(문혜공) 諱 康(휘 강)이시고, 考(고: 부친)는 寶文閣提學(보문각제학) 諱 謝奇(휘 사기)이시며,外祖(외조)는 中贊 良靖公 蔡仁揆(중찬 량정공 채인규)이시다,公께서 宋(송)나라의 咸淳甲戌年(함순 갑술년 단기3607 서기1274년)에 태어나시니명문출신으로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顯官(현관)을 역임하시니右代言(우대언), 密直司 左承旨(밀직사 좌승지), 選部典書(선부전서), 知密直司事(지밀직사사)등의 顯赫(현혁)한 관직이었다. 至治辛酉年(지치신유년 단기3654 서기1321년)에 忠肅王(충숙왕)을 수행하여 元(원)나라에 가셨는데 瀋王(심왕) 暠(고)가 분수 밖의 욕망으로 왕위를 넘보고 허위로 여러 트집을 잡아 왕을 괴롭히므로公께서 그 장소에 꼭 지켜 서서 일행을 안심시키고 동행한 대신들과 더불어 성심성의로 보호하고기발한 계략으로 왕에 미치는 위급한 화를 막아냄으로 인하여 일등공신으로 鐵拳(철권: 훈패)에 기록되고 壁上(벽상)에 圓形(원형)되었으며, 宣力佐理功臣(선력좌리공신)에 敍勳(서훈)되시고여러 차례 승진하여 贊成事(찬성사)로 또 中贊(중찬)으로 승진 되셨다. 己卯年(기묘년)에 王位(왕위)의 繼序(계서)가 있을 때 또 다시 奸媒輩(간매배: 간신배)의 騷亂(소란)이 있으므로 公께서 잠시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중신들을 거느리고 계략을 세워 국난을 극복 하셨고 庚申年(경신년)에 都僉議右政丞(도첨의우정승)에 拜命(배명)되시었다.公은 4대 왕조를 섬기면서 한결 같이 충성을 다하시고 만년에 府院君(부원군)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私邸(사저)에 계시다가 正壬年(단기3675 서기1342년) 4월 13일에 향년 69세로 돌아 가셨다. 후에 忠惠王廟(충혜왕묘)에 配享(배향)되시고 묘는 장단 세곡 유좌에 모시었다.公의 精忠偉烈(정충위열)하심은 종묘에 비치된 솟(鼎彛)에 새겨있고 竹帛(죽백)에 기록이 소상하게 나와있다.남기신 풍도와 훌륭한 공적이 후세에 본이 될 만한 것이 많으며고려사에도 전기가 있기는 하나 그 기재 내용이 너무나 간략하다.

純祖壬戌(순조 임술년 단기4135 서기1802년)에 묘소를 改莎草(개사초)하다가誌石(지석)이 발견되었는데 事蹟(사적)을 기록한 부분이 심히 마모되고 단절되어 고증하기가 어렵게 되었다.이것이 자손된 우리가 다 같이 애석해하는 바이다.公의 품성은 근면하고 신중하며 器局(기국)은 高邁(고매)하여 매사에 반드시 세 번 思考(사고)한 후에 행하였고 몽고어 한어에도 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천성이 溫雅精敏(온아정민)하며 도리와 교훈에 있어서 유학의 교풍을 지키고관직에 있어서의 처사는 안정되고 상서로우며 근신하여 모나거나 불화가 없이 좋은 계략을 모색하여 원만히 처리하였다.벼슬이 재상 지위에 있으면서도 국정을 내 집 일 같이 걱정하여 항상 민폐를 덜고時務(시무)를 바로잡아 다스렸으므로 근래에 공보다 훌륭한 재상은 없었다고 전하고 있는 사실은誌石(지석)에서 처음 알 게 된 일이다. 요컨데 공께서 진두지휘의 책임을 지고 위급에 대비하는데는寧武子(녕무자)의 主患(주환)을 防衛(방위)하던 故事(고사)나 방불케 하고여러모로 智謀(지모)를 짜서 침착하게 禍難(화난)을 방지하는데는 散宜生(산의생)이 신하로서의 도리를 극진히 한 故事(고사) 바로 그것이었다.大義(대의)를 위한 큰 절개가 능히 천지를 흔들만 한데 전기에도 누락된 것이 많고 지석에도소상한 점이 없다고 해서 통탄할 것이 있겠는가.

부인은 卞韓國大夫人 原州元氏(변한국대부인 원주원씨)이시니 부친은 同知密直 卿(동지밀직 경)이요.祖(조)는 中贊 文純公 博(박,보)이며, 묘는 합장으로 모셨다.일곱 아들을 두셨는데 장남 大淳(대순)은 知都僉議(지도첨의)요,둘째는 公義(공의)니 尙書 平簡公(상서 평간공)이요,셋째는 中禮(중례)니 政堂文學(정당문학)이요,넷째는 公衍(공연)이니 覺星大禪師(각성대선사)요,다섯째는 方信(방신)이니 贊成事 太學士 西原君(찬성사 태학사 서원군)이요,여섯째는 公瑞(공서)요, 일곱째 方道(방도)는 諡 忠靖(시 충정)이다.또한 두 따님이 계시니 장녀는 三司左使 洪澍(삼사좌사 홍주)에게,차녀는 知密直司事 權恒(지밀직사사 권항)에게 출가하였다.지석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繼配(계배)가 있었는데 正尹 宋謀(정윤 송모)의 따님으로서소생의 아들이 몇 명 있다고 하였으나 보첩에는 기재되지 않았다.平簡公(평간공), 西原君(서원군)의 兩派(양파)가 더욱 번창하여 다섯 분 왕비를 탄육하여경사무궁한 앞 길을 인도하시니 성자와 신손이 왕업을 계승하시고 本孫 支孫이 대대로 蕃衍(번연)하여 유명한 대관이 배출되어 蔚焉揚廷(울언양정)하여 佐翊邦家(좌익방가)하니 참으로 놀랍다.公의 위대한 공훈은 그 당시로 그치지 않고 조선조에 까지 무궁하게 흘러 관록의 혁혁한 여경이지금에도 지속되고 있으니 이것은 곧 큰 積德(적덕)의 여음이 긴 후일에까지 미치기 때문이다.

묘소가 중간에 실호되어 비석이 두 개나 있었으나 모두 글자가 훼손되어 제종들이 다시 비석을 세워 영구히 전하려고 나에게 비문을 쓰라고 함에 감히 사양할 수가 없어서 이 글을 쓰니자손된 우리들은 그 유지를 받들어 욕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바란다.

위대하신 사숙공은 고려조의 名臣(명신)일세이 세상을 다스려 文物(문물)이 彬彬(빈빈)하오燕京(연경)의 死地(사지)에서 왕의 화를 막아내니범의 꼬리 밟고 넘어 麟閣(인각)에 공 세웠네님을 위한 일편단심  거듭거듭 수훈일세君國(군국)에는 盡忠(진충)하고 만민에게 施惠(시혜)로다남긴 風度(풍도) 오래건만 아직까지 새로워라聖女(성녀)도 탄육하고 賢良宰相(현량재상) 많이 낳네의연한 저 묘소는 오백년이 되었는데빗돌(비석)에 글을 새겨 천년 만년 전하리라.

공께서 돌아가신 후 무진년 순조 8년(단기4141 서기1808년) 8월

후손 이조판서 만유(晩裕) 찬(撰:지음)

좌의정 용구(用龜구) 서(書:글)

형조판서 용탁(用鐸) 전(篆:전서)

 

묘소중심수호지(先祖思肅公墓所重尋守護志)

 

<역문해설> 公이 元順帝至正二年壬午(원나라순황제 2년 임오) 즉, 우리나라의  고려 충혜왕 3년(단기3675 서기1342년) 4월 13일에 서거하시니   동년 8월 21일 장단부 북방 십오리 지점의  東道面 細谷山 酉坐巽得丑破局(동도면 세곡산 유좌손득축파국)에  예장하였다.  그 후 얼마지 않아 고려에서 조선으로 혁명되는 와중에  묘소의 관리가 소홀하여 묘비까지도 유실되게 되었다.

장례 후 113년이 되는 이조 단종 2년(갑술 단기3787 서기1454년)  2월에 현손 五代孫 右議政 確(우의정 확),  府使 瑞龍(부사 서룡), 縣事 黎(현사 려),  泰敎 瑞鳳(봉교 서봉), 丞 瑞龜(승 서구),  六代孫 少尹 明澮(6대손 소윤 명회), 敎理 繼禧(교리 계희), 錄事 明진(녹사 명진),  司直 繼善 (사직 계선), 大護軍 終孫 (대호군 종손) 등이새로 墓碣(묘갈)을 고쳐 세웠으나 그 후 또다시 임진왜란의7년 병화로 경기 일대가 휩쓸려 산소를 잃어버리고 석물까지도 전부 유실되었다.  묘갈을 세운 甲戌年(갑술년)부터 155년 후인 萬曆(만력) 36년(戊申(무신) 선조 41년 단기3941 서기1608년)여름에 후손 孝純(효순)이 松都留守(송도유수)로 있었는데孫熙祖(손희조)라는 선비가 부친되는 順良(순량)과 함께 와서 말하기를 근처 長湍(장단) 땅에서우연히 옛 비석이 발견 되었는대 부셔져서 그 형태가 완전하지는 못하나高麗侍中韓渥之墓(고려시중한악지묘)라는 刻字(각자)가 있고후면에도 기록된 陰記(음기)가 있다 하므로 孝純(효순)이 그 장소에 달려가 자세히 살펴본 즉이 비석이 민가의 柱礎(주초)와 섬돌 사이에 매몰되어 있는데과연 壬午(임오)年에 처음 세운 비석임에 틀림이 없었다.그리하여 다음해 己酉年(기유년) 봄에 다시 묘 앞에 세우되 甲戌年(갑술년)에 세웠던 비석과이 故碣(고갈)을 나란히 함께 세우고 양 편에 이 사실을 새겨 두었다.그러나 그 때는 光海亂政時(광해군의 어지러운 때)가 되어서 國事(국사)가 혼란에 빠져私家(사가)의 일을 돌 볼 여가가 없음으로 인하여 또 다시 실전되었다.

그러나 42년 후인 孝宗 3년(효종 3년 壬辰 단기3985 서기1652년)에후손 碩中(석중)이 묘자리를 구하려고 산을 둘러보다가 묘갈을 발견하게 되어 이 산소를 찾았고그 후 152년 되던 純祖 4년(순조 4년 甲子 단기4137 서기1804년) 가을에후손 光燮(광섭),大裕(대유), 興裕(흥유), 用龜(용구), 用鐸(용탁) 등이 여러 종인과 합력하여새로운 묘갈과 床石(상석), 望柱石(망주석) 등을 갖추고 산소도 개봉축하였으며이와같이 여러 차례 실전하였다가 찾은 사실을 譜冊(보책)에 등재하여이후 천만대라도 명백한 고증이 되게 하려 함이다.

16대손 광섭(光燮) 근지(謹識)

 

石儀時通文 : 惟訝先祖麗朝右政丞上黨府院君……

 

墓誌銘 : 麗朝都僉議右政丞上黨府院君思肅公……

 

사숙공 유시(思肅公 遺詩)

遺詩(1)

折槍黃馬捲塵埃                                  창을 접은 누런 말은 먼지를 일으키고

掩耳凶徒파(心+白)疾雷                        귀를 가린 흉도들은 우로를 겁내네.

雪密酒紺偸號去                                  폭설 속에 술에 취해 외침없이 가 버리니

月明衣冷斫營廻                                  달은 밝고 옷은 추운데 순찰을 도는구나

行驅비虎被金甲                                  달리는 사나운 짐승은 금갑을 입었는데

立廳笙歌擲玉杯                                  일어 서서 피리소리 들으며 옥배를 던지고

坐久不須輕확(目+目+雙)삭(金+樂)         오래 앉아 장건함이 없다고 말을 마소

至今雙擘硬弓開                                 지금 두 엄지 손가락으로 센 활을 당기노니

 

<뜻 풀이> 

折槍(절창) : 창을 접다, 창을 옆구리에 끼워 두는 것

掩耳(엄이) : 귀를 막다

偸號(투호) : 부르짖는 소리를 게을리 하는 것

비虎(비호) : 사나운 짐승과 호랑이

笙歌(생가) : 피리와 노래(오랑캐들의 무리를 뜻함)

不須(불수) : ~을 요구하지 말라

雙擘(쌍벽) : 두 엄지 손가락

硬弓(경궁) : 당기기 힘든 활

 

遺詩(2)

早發藍關                                   남관을 일찍 떠나며

(이 시는 사숙공께서 중국에 사신으로 가실 때 남관역을 새벽에 일찍 출발하며 지은 글이다. 참고로 남관역은 중국의 북경으로 가는 중간의 협서성 남전현이다)

閉門愁立待鷄鳴                         문 닫고 시름에 잠겨 서서 계명을 기다리니

搜景馳魂入杳冥                         경치 찾아 달리는 혼 아득하기만 하구나

雲外日隨千里雁                         구름 밖의 기러기 매일 천리를 가고

山根霜共一潭星                         산 부리의 서리는 물에 비치는 별과 함께 하네

路盤偶見퇴人火                         길을 돌아 퇴인을 만나게 되고

棧轉時聞驛使玲                        산비탈을 돌아 갈 때 역마의 방울 소리를 듣는다.

自問辛勤緣底事                        스스로에게 무슨 일로 이 고생인지 물어 보고

半生驅馬望長亭                        반생을 말 달리며 이정표를 바라보네.

 

<뜻 풀이> 

搜景(수경) : 경치 좋은 곳을 찾는다 = 探景

杳冥(묘명) : 아득히 먼 모습

一潭(일담) : 못, 웅덩이, 일담성은 물에 비친 달을 뜻함

퇴人(퇴인) : 짐승이나 새를 물에 데쳐 털을 뽑는 사람(胡人)

棧(잔) : 잔도 = 산 비탈을 깎아 만든 길

底事(저사) : 무슨 일로, 무슨 까닭으로

長亭(장정) : 십리마다 세운 이정표 혹은 주막 오리마다 있는 것은 短亭(단정)이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