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성군 평간공 휘 공의(淸城君 平簡公 諱 公義)

 

高麗國三重大匡淸城君贈諡平簡韓公(諱 公義) 墓誌銘

 

<원문 해설> 고려국삼중대광 청성군 증 시 평간한공(휘 공의) 묘지명

奉翊大夫藝文館大提學 李 檣(봉익대부예문관대제학 이 색 지음)

왕이 즉위한지 14년에 비로서 平簡公(평간공)이 密直副使(밀직부사)에 임명되었다. 그 해 겨울에 장차 다가올 원나라의 새 왕조인 정조를 하례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사절을 보내려고 대신들이 회의를 열어 원나라 승상이 궁전 뜰에서 투구와 갑옷으로 천하를 호령하며 일찍이 뵙기를 재촉하니 실로 죽음을 무릅쓰고 보낼 적격한 사절을 선정하기 곤란하다고 왕에게 고하니 왕이 그 즉시 傳旨(전지)를 내리기를 "한모가 아니면 안될 것이다"  하고 공을 불러들여친히 "정유년에 聖節(성절)을 하례하러 갔을 때도 무나히 잘 다녀 왔으니 나는 가상히 여겨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있다. 이제 네가 또 가서 공경히 할지어다"하니공이 두 번 절하며 말하기를 "신과 같이 불초한 자가 樞府(추부)의 자리만 지키고다른 재능이 없어 聖恩(성은)의 만분의 일도 갚지 못하고 있는 터에 어찌 감히 사명을 피하오리까?"하고  사절로 가니 과연 왕의 뜻에 부합한 바 있었다.얼마 후 封君(봉군)되고 집으로 돌아가 다시 기용되기를 기다렸더니 아!, 슬프다,갑자기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公의 성은 한씨이니 대대로 청주사람이었다.먼 조상에 蘭(란)이란 분이 계셨으니 고려 개국의 공이 커서三韓功臣(삼한공신)의 호를 내렸다. 그 후 이름이 있는 분은 康(강)이니元宗(원종) 때에 成均館(성균관)의 시험을 관장하였고 충렬왕을 도와서두 번이나 知貢擧(지공거)로 국가의 고시를 관장하였으며, 中贊(중찬)으로 임명되시니시호는 文惠(문혜)였다. 문혜공이 諫議大夫 謝奇(간의대부 사기)를 낳았고簡議公(간의공)이 上黨府院君 渥(상당부원군 악) 낳으니 시호는 思肅(사숙)이며충숙왕이 원나라에 참소 당하여 욕보고 있는 것을 기발한 계책으로 왕을 위기에서 구하였고또, 충혜왕을 도와서 두 번이나 정승이 되어 大廟(대묘)에 배향되었다. 사숙공이 同知密直典理判書 元卿(동지밀직전리판서 원경)의 딸과 결혼하여아들 다섯을 낳았으니 장남 大淳(대순)은 죽었는데,벼슬이 知都僉議司事(지도첨의사사)였고中禮(중례)와 方信(방신)은 鲞政堂文學(정당문학)이었으니공은 차서에 있어 그 둘째였다.형은 아우를 우애하고 동생들은 형에게 공손하여 사람들이 모두 형제애를 흠모하였고,또 다른 형제는 불법을 배워 覺星(각성)이라 이르니 조계종의 학자라,공의 이름은 公義(공의)요, 자는 宜之(의지), 향년 59세였다.처음에는 錄南部事(녹남부사)가 되었더니 충혜왕이 알아보고 계급을 초월하여護軍(호군)에 제수되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大護軍三司右尹(대호군삼사우윤)이 되었다.그 때에도 안정되고 경거망동하지 않는 굳은 심기로 인해세상 일을 좌지우지하는 자들에게 미움을 받아 全州牧(전주목)으로 나가백성에게 惠政(혜정)을 베푼 바 있고 충목왕 때에 小府(소부), 衛尉(위위), 繕工(선공)의세 判事(판사)를 역임하였고 충정왕 때에는 代言(대언)에 발탁되었으며,왕이 遜位(손위; 왕위를 이성계에게 물려 줌) 하던 날 白馬山(백마산) 아래로 달려가 사사로"임금과 신하는 모름지기 시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하니 왕이 공은 충성이 있다 하여그 재능을 시험한 것이 오래전이더니 관제를 개정하면서 散騎常侍(산기상시)에 임명하고곧 戶部尙書(호부상서), 2년 후 形部(형부)로 옮겼는데 토지에 대한 송사가법대로 처결되지 않는다고 여러 사람들이 떠들다가 공이 들어가서 일에 따라 처결하니원망하는 사람이 없더라. 그가 조정에서 결재할 때 옳지 못한 것은 반복해서라도그 것을 고친 후 서명하였다. 부인 慶(경)씨는 右大言 斯萬(사만)의 따님이요.贊成事 鄭해(찬성사 정해; 王+皆; 검은 옥돌 해)의 외손인데 남편에게 화순하고자녀들이 본 받는 어머니였다. 아들 셋이 있는데脩(수)는 학문을 좋아하고 옛 것에 능하여과거급제를 거쳐 관직에 나가 현재 軍簿判書(군부판서)로 있으며,다음 理(리)도 역시 과거급제하여 현직 開城判官(개성판관)이요.그 다음 齊(제)는 별장으로서 과거를 보려고 학업을 닦고 있고딸 3명은 모두 먼저 죽었는데 宗簿令 金士謙(종부령 김사겸)과三司右尹 李彰路(삼사우륜 이창로)와 軍簿判書 廉興邦(군부판서 염흥방)은그의 사위들이다. 손자가 넷인데 右復(우복)은 別將(별장)이요, 다음이 善復(선복)이고 그 다음은 다 어리며손녀가 5명이다. 외손자인 金禑(김우)는 權務(권무)이며, 손녀2명이 있다. 장차 12월 甲申日(갑신일)에 臨津縣 瑞谷(임진현 서곡) 남쪽 산기슭에 장사 지내려 하는데脩(수)와 興邦(흥방)이 와서 墓銘(묘명)을 내게 구하니 공의 아들과 사위는 모두 나의 벗들이다.벗의 아버님 묘에  銘(명)하는 것을 어찌 사양하겠는가.공께서 賢詳勤儉(현상근검)하셨고 예법에 따라 행동이 일체하였으며 온화하였으나마음의 뜻을 펴지 못하여 經世濟民(경세제민)의 才具(재구)로 하루도 국정을 맡지 못한 것도역시 하늘의 뜻이다. 그러나 몸과 행실을 바로하고 아들들을 가르쳐 모두 출세시켰으며돌아가신 후에도 아름다운 시호를 얻었으니 이것만으로도 후세에 전하기에 족하며 유감이 없다."문혜공의 손자요 사숙공의 아들이니 그 형제들이 모두 이름을 떨치도다.공이 왕을 처음부토 끝까지 한결 같이 섬기니 충정왕은 그의 충성은 묻지도 않고먼저 재능을 시험하여 두 번이나 원나라에  조관함을 수행하니 왕이 칭찬하였다.이에 사람들은 이제야 때가 왔다고 하였으나 공은 물러나고 말았다.어떤 공도 이보다 높을 리 없건만 거기에 그치고 말았으니누가 하늘의 이치를 증명할 것인가.내 여기에 시를 지어 오는 세상에 물어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