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부원군 증시 문간공 휘 상경(西原府原君 贈諡文簡公 諱 尙敬)

 

推忠同德翊戴開國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兼 經筵藝文春秋館書雲觀事
世子師 西原府院君 贈諡文簡 諱 尙敬

 

 

<역문해설> 

  승정원 일기에 이르기를

  세종대왕 5년(서기 1423년)3월 무자 초7일에 우박이 내리다.

  서원 부원군 한상경이 졸하다. 상경의 자는 숙경(叔敬)이며,

  청주인으로 문경공 수(脩)의 아들이다.

  고려조에 출사하여 사선서령(司膳署令)을 지냈고

  임술 문과에 3인으로 급제하여 예의좌랑이 되었다가

  우정언(右正言)으로 옮겼으며,

  전리정랑 예문응교 공부총랑 종부령등을 역임하고

  임신년에 밀직사 우부대언에 올라 태조 개국시에 추대의

  의논에 참여하여 보새(寶璽; 옥새)를 받들어 바쳤다.

  익대개국공신의 호를 받았고 중추원 도승지에 올라

  추충익대 개국공신이 되고 첨서중추원평의사사를 거쳐

충청도 도관찰사에 나갔으며, 서원군에 봉하여 졌고 경기좌도 관찰사가 되었다.

건문 2년(정종 2년, 서기 1400년)에 태종이 즉위하여 상경에게 이르기를

 " 내가 대통을 이었으나 나라의 일을 유제(攸濟)할바를 모르겠으니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라

하시니 상경이 대답하기를 고인의 말에 후간(后艱)을 극복해야 그 后가 된다고 했으니

이제 전하가 그 艱을 극복할 것을 알고 있으니 이는 동방의 복입니다.

그러나 非知之艱이요, 行之惟艱이라 하였더니 태종이 가납하여 참지의정부사로 삼았다.

흠차병부주사 단목지(欽差兵部主事 端木智)가 왔을 때 상경을 接伴使(접반사)로 명하여

수구를 예대하였더니 단목지가 이르기를 晏平仲(안평중)은 선으로 입교하였던 탓으로 오래도록

恭敬(공경)을 받드니 공이야말로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하였다.

외직으로는 풍해 강원도사를 지내고 공조참서가 되었다가 지의정부사겸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다

태종이 북방을 순행할 때 상경을 보내어 흠문 기거하였고 호조참서로 전임하였다.

3공신이 헌수할 때 상경이 축하의 잔을 올리니 태종이 이르기를

내가 즉위 초에 경이 나에게 말하기를

后克艱厥后(후극간궐후)하고

非知之艱(비지지간)이요

行之惟艱(행지유간)이라고 했는데 내가 아직도 이 말을 잊지 않고 있다 하니

상경이 왕께서 신의 그 말을 잊지 않고 계신다고 하니 다시 한마디만 아뢰겠다고 하니

왕께서 무슨 말이냐고 하자 처음은 쉬우나 끝은 어려운 법이라고 하니 다시 칭찬하셨다.

참찬의정부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병신년에 서원부원군 의정부우의정에 승진되고

무술년에 영의정이 되어 부원군에 봉하여졌다.

 

상경이 평소에 풍질을 앓고 있었는데 경자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슬퍼하며 예를 다했던 탓으로 병이 더욱 악화되어 왕이 염려하여 대언을 보내 문병하고 內醫(내의)를 보내 치료하기를그치지 않았으나 향년 64세에 별세하였다.

왕이 부음을 듣고 슬퍼하고 지체없이 사신을 보내 조위하고 3일간 조회를 폐하였으며

장사를 관에서 보살폈으며 부의를 내리고 시호를 문간이라 하였다.

문간의 文(문)은 勤學好問(근학호문)의 뜻이고, 簡(간)은 一德不懈(일득불해)의 뜻이다.

상경이 어려서부터 놀기를 즐겨하지 않고 識量(식량)이 精敏(정민)하여 행동이 端恭(단공)하더니 자라 벼슬길에 오른 뒤에는 청결을 지켜 오래도록 銓選(전선)을 관장하였으되

공정을 잃지 아니하였다. 집에 있을 때는 검소하고 의복과 음식은 깨끗한 것이면 족하였다.

어머니 섬김에 있어 조석문안을 미루지 않고 친히 어머니의 음식 맛을 보았으며, 나이 늙고 벼슬이 비록 높아져도 그치지 않았다. 스스로 부르기를 信齋(신재)라 하였다.

상을 당하여 장사를 다 끝내고 본인의 병이 깊어지자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 병이 오래되어 노친보다 먼저 죽어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불효를 할까봐 걱정하였는데

이제 자식된 도리를 다하였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였다.

아들은 惠(혜)이다.

같은 달월 기축일에 왕이 명하기를

창녕부원군 成石璘(성석인)과 서원부원군 한상경의 致賻(치부)는

완산부원군 李天佑(이천우)의 예에 따라 각기 米豆共(미두공) 70석과 紙(지; 종이) 150권을 내리라 하였다.  

 

 

遺  事(유사)

 

 

<역문해설> 

  상경의 자는 숙경이요, 脩(수)의 셋째 아들이니

  아태조조 때 사람이다.

  고려 공민와 9년(서기 1360) 경자생으로

  23세에 을과 제3인에 발탁되다.

  세종 5년 계묘(서기 1423년)에 졸하니 향년 64세라.

  관위가 영의정이요, 호는 信齋(신재)이다.

  여지승람에는 상경은 수의 자니 개국공신으로 서원군에 책봉되고

  시호는 문간이라고 되어 있다.

  등과록에는 상경의 자는 숙경이요, 홍무 5년(임술)에 을과 제3인으로

  등제하고 영락 13년 병신에 우의정이 되고 14년 무술에 영의정에

  승진되고 서원부원군에 책봉되었으며 시호는 문간이라 하였다.

  21년 계묘 3월 초7일에 병환으로 정침에서 졸하니 향년이 70여요,

호는 신재라 기록하였다.

徐居正(서거정)이 찬한 한계희 신도비문에는 상경은 우정승이고 시호는 문간이라 쓰여 있다.

李山海(이산해)가 찬한 한여필 묘갈문에는 상경은 아조에 와서 관위가 영의정이요,

서원부원군에 책봉되고 시호는 문간이라 쓰다.

申用漑(신용개)가 찬한 한기문 신도비문에는 상경은 이태조의 개국을 보좌하여 산하같이

공훈을 세우고 관위가 영의정이 되었으며 서원부원군에 책봉되었고 시호는 문간이라 쓰다.

宋寅(송인)이 찬한 한기 신도비문에는 상경은 이태조를 도와서 개국공신이 되었고,

관위가 영의정부사요, 시호는 문간이라 쓰다.

許筬(허성)이 찬한 한여필 묘지명에는 상경은 이조에 와서 개국훈공으로 영의정, 서원부원군에

책봉되었다고 쓰다.

鄭斗卿(정두경) 찬한 한금 묘지에는 상경은 태조를 보좌하여 개국공신에 책봉되고,

관위가 영의정으로 서원부원군이고 시호는 문간이며 호는 신재라고 되어 있으며 또한

문장으로 유명하다고 쓰여 있다.

家譜(가보)에는 상경은 추충동덕 익대개국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서원군 시문간이요, 부인은 판서 吳俊良(오준량)의 따님으로 마한국대부인에 책봉되었다고 써있다.

또는 추충동덕익대개국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겸 영경연예문관 춘추관서운관사 세자사 서원부원군 증시문간공이다.

타고난 자질이 정민검약하고 조리가 청아하고 시에 능하며 문사가 능란하여 격에 맞았다.

4대 왕조를 내리 사사하면서 천장한 명망과 단아한 지조로 일세의 선망이 컸다고 썼다.

遺象(유상)이 있어 후손 부사 한석의 집에 봉안되어 있다.

 

 

기타 여러 문헌에 남겨진 유사 遺事(유사)

 

南崗世蹟家藏(남강세적가장);

 洪武二十七年 我太祖大王 三年甲戌 四月二十六日 以前朝賜姓 今不可用 復本姓權氏 都承旨韓尙敬 次奉承傳 施行

(홍무이십칠년 아태조대왕 삼년갑술 사월이십육일 이전조사성 금불가용 복본성권씨 도승지한상경 차봉승전 시행)

 

<역문해설> 홍무 27년 우리 태조대왕 3년 갑술년(서기 1394년) 4월 26일에 고려 때 사성한 것을 이제는 쓰는 것이 옳지 않으니 본성인 권씨로 복성하라하니 도승지 한상경이 그 전지를 받들어 시행하였다.

 

 

朝鮮人號簿(조선인호부);

 韓尙敬 字叔敬 竹所弟 號信齋 禑朝科 入本朝 開國功臣 官領議政 西原府院君 諡文簡 王氏子孫將盡被誅公救免之以報前朝之恩

(한상경 자숙경 죽소제 호신재 우조과 입본조 개국공신 관영의정 서원부원군 시문간 왕씨자손장진피주 공구면지이보전조지은)

 

<역문해설> 한상경은 자가 숙경이며, 죽소의 동생, 호는 신재, 고려 우왕때 등과하여 이조에 들어서

개국공신이 되고 벼슬이 영의정이며 서원부원군에 봉해지고 시호는 무간이며, 왕씨 자손이

모두 죽음을 당하게 되자 공이 구하고 사면케 해주어 이로써 전조(고려)에 보답하였다.

 

 

信齋記(신재기)

 

 

<역문해설> 글쓴이; 陽村 權近(양촌 권근)

  동료인 참지한공의 호가 신재니 명조의 사신 단목선생이

  그 편액을 예서하고 또 자상하게 서문을 썼다.

  이것을 가지고 나에게 보이며 記(기)를 청하니 參知(참지)는

  吾宗(오종)의 宅相(택상; 외손)이 되는 사람이다.

  오래전부터 친숙한 사이요 직장에 근무하는 동료이니

  의리상 掘文(굴문)이라 하여 피할 수 없는 처지이다.

  대체 人性(인성)은 天命으로 받은 것이니 천명은 元(원)하고

  亨(형)하고 利(리)하고 貞(정)하여 한 없이 화평하고

  아름답고 맑은 것은 공평무사하고 순일한 誠(성)이니

  곧 天道인 것이다.

  그것이 사람에게 부여되면 五常之性으로 仁義禮智信이라고

  성인의 타고난 본성으로 순일한 천성이요, 학자는 노력 후에야 그 性의 德을 충실히 할 수

  있나니 信이 있어야 충실히 행할 수 있다.

  소삭을 이용하는 것도 아니요 가면이나 강제로 되는 것도 아니다.

  본래 성분중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로되 단지 사람들이 물욕에 가로 막혀 힘쓰지 못하는 것이

  걱정될 뿐이다.

  대저 천연의 誠은 元亨利貞의 實이니 사람에 있어서는 바로 이것이 實心인 것이다.

  仁이라 하는 것은 惻隱(측은)의 端(단)이요, 측은의 實은 핵심이 바로 信이다.

  義와 禮와 智가 모두 그런 것이니 誠은 元亨利貞에서 떠나지 아니 하거늘........

 

 

信齋說(신재설)

 

 

<역문해설> 글쓴이; 李詹(이첨)

  하늘이 五行을 널리 전파하여 土가 사계절을 따라 왕성하듯이

  사람이 五常을 갖추는데는 信이 四端의 근본이 되었으니

  土와 信이 專氣가 아니고 일정한 위치도 아니어

  세공을 이루는데나 人道의 소행이 반드시 여기에 말미암은 것이라

  주역에 이르되 天道의 운행은 꾸준한 것이니

  군자는 스스로 힘써 휴식이 없어야 한다.

  運行이 꾸준한 까닭에 춘하추동이 교대하고 주야회월과

  日月의 盈측(해와 달의 차고 기움)이 자고로 지금까지

  일순의 차도 없는 것이요, 힘써 휴식치 않는 까닭에

  스스로 본심을 바로하고 정신을 수양하여 나와 만물이 서로 응접하는

  사이가 일념의 오차도 없는 것이다.

  대체로 천하 만물이 빈틈없는 진리로 되어 있는 까닭에

  반드시 이 이치에 꼭 맞는 연후라야 만물도 그 性을 온전히

  갖게 되는 것이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라도 그 실리를 얻지 못한다면

  信이 아니요, 천하의 이치가 나의 중심에 갖추어 있으니

  動하고 靜하는 것 하나가 實에서 나온게 아니라면

그 또한 信이 아닌 것이다. 또는 내가 저 物에 감응하거나 그 物이 나에게 감응되는 것도 모두가 信인 것이다. 그러기에 忠과 信이면 오랑캐 땅에 가더라도 옳게 일할 수 있을 것이요 말하기 전에 信을 감지케 되면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이니

진실로 仁과 善에서 그 존양을 성실히 하면 성인과 같이 信을 體用하여 순리에 통달하는 극치에 이를 수 있으리라.

천지가 정위치에 자리하고 있어 만물이 자연스레 육성되고 四靈이 어김없이 출현하는 것이니 舜(순) 임금은 백성들에게 信이 미치지 못한 데가 있어도 백성을 다 服信하였다.

忠과 信이 없게 되고 人心이 의아를 품게 된 후부터는 信을 지키기 위하여 상호간에 서약을 작성하는 제도가 생겼고 춘추시대의 5인동지인 五伯(오백)도 그의 주장인 仁義가 實에서 나온게 아니라 거짓 仁義였으니 거짓이라면 信이 아닌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仁이라면 내 생명을 이어 줄 끼니와도 바꿀 수 있으며 군자는 信이라면 둘도 없는 내 생명과도 바꿀 수 있는 것이니 성인군자가 이 信에 대하여 이토록

정성드리고 조심하는 것은 후인들이 詐術(사술)을 써서 하늘을 속일까 恐懼(공구; 두려워하다)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만물화생의 근본인 원기를 지닌 성인이시다.

그 원기가 운행하는 조화에 毫髮(호발; 털 끝 만큼)의 차이도 없어서 사람들을 교도하는 데는 忠信을 위주하고 忠信을 본받아 수학하는 동배들에게는

曰克己니 사욕을 누르고 예절을 쫓을 것

曰誠意니 참되고 정성스러운 마음을 가질 것

曰誠身이니 性行이 바르게 몸을 가질 것

曰思誠이니 사고방식을 신중하게 정성을 다할 것 등을 교도하였으니

曾子 子思 孟子의 학문 정통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상당 한공은 마음가짐이 돈독하며 친구와 교제하는데 정직하고 성실하며

웃 사람을 받들고 아랫 사람을 어거하는데 성의와 의리를 다 하였다.

信을 지켜 잊지 않으려는 뜻에서 그 書齋扁額(서재편액)에 信字를 썼으니 그 심지가 독실하고 그 강학이 정근하고 그 실행이 至處(지처)하였다.

글 솜씨의 鄙陋(비루; 남루)함을 가리지 않고 여러차례 청하니

하챦은 나로써 그 아량을 받아 들여 감히 이 해설을 쓴다.

 

 

畵像贊(화상찬)

 

 

<역문해설> 

  글쓴이 吏曹參判 東州 李敏求(이조참판 동주 이민구)

  공은 화벌 출신이니 그 선고인 류항선생으로 부터 대를 이어온

  문학가이시다.

  이조의 창건 초기에 이르러 개국공신에 책봉되었고

  4대 왕조에 역사하여 위계는 수상까지 지내고 서거하였으며

  자손이 번창하여 명성 높은 거족을 이루었다.

  전래되어 오는 遺像(유상) 두 폭이 종손 允治(윤치)의 집에 있으니

  그 중 하나는 端委(단위)한 禮昭(예소)와 大帶(대대)로 儀式(의식)과

  법도를 갖춘 대관으로서 엄숙한 모습이니

  왕실에서 법식을 심사하여 이루어진 畵本(화본)이요,

  또 하나는 산중은사의 두건과 평상복으로 유유자적한 모습이니

  사저에 한거할 적에 이루어진 화본이다.

  전해 온 것이 지금까지 300년이라 오염되거나 없지 않아서

  여러 자손들이 상의하고 능숙한 工人을 불러 훼손을 보완하고

  또 畵工에게 명하여 거친 면직 바탕에서 생사초로 화면을 옮겨

  후일 영원토록 전하는데 염려 없도록 대비하였다.

  제사일에는 위전에서 뵐 수 있을 것이요, 무심히 오고 가는

  그 문전에서 탄식이 성음이 들릴 것이니 늘 항차 엄숙한 모습이

  그 위좌에 계셔 영구히 변함없이 담소하시는 성음으로

  강림하시는 듯 하시니 자손이 추원하는 성의가 조금도 해이할 수가

  없을 것이요 민덕의 귀취가 어찌 후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삼가 贊(찬)을 쓰니,

 

하나님이 보우하사 國基를 마련할 때에 중신에게 사명주어 지덕 높은 명신이라

명망 높은 韓相公은 天稟(천품) 좋고 미덕있어 위의당당 네왕조에 3사 모두 歷典하니

공신이며 澹爵(담작)으로 선정으로 소문 높아 開府에 바친 공은 彛鼎(이정)에 새겼도다.

遺像은 아직 선명하나 春風秋雨 옛날이니 수백세를 지난 후엔 거듭 거듭 丹靑하라

공의 후손 효성 있어 그 遺像을 보존하리 그 법식을 계승하여 영원토록 전하리라.

 

 

<原文>

天開聖作手扶日곡經濟治平道尊德宿詩禮學業厥亦有源柳巷之庭牧隱之門措諸事爲仁洽義敦勝國餘裔一言以全端委廊廟贊元是專眷隆  累朝位冠三事茂伐殊勳世莫與比凌烟舊盡久而猶新朝衣燕服一則半身燁然電眼凜乎風神美髥欲動玄髮未銀雲仍謹守世有其人丹心未盡厥像尙傳端莊簡重仰之宛然曷不肅敬永垂千年

        (領議政 白軒 李景奭 撰)

 

<역문해설> 

글쓴이   영의정 백헌 이경석

천의 받아 나신 성군 태양을 잡았도다

濟世安民(제세안민) 좋은 정치 도덕관념 높아지네

詩와 禮로 익힌 학업 이 또한 淵源있으니 류항선생 가문이요 목은선생 문인이라

조처하는 모든 일이 어질고 의로우니

고려조의 후예이나 무난하게 보전하였네

의와 예를 갖춘 廟堂에서 왕업익찬 일념이니

누대왕조 신임 받아 三司의 長 역임하고

특수한 그 공훈은 따를 사람 없으리라

凌烟閣에 옛날 화상 오랠수록 더 새로워

조례복과 평상복에 그 하나는 반신이라

電燭(전촉)같은 안광이요 늠름한 풍채로다

고운 수염 날리는 듯 백발 아닌 검은 머리

자손들이 수호하니 대대로 끊임없이

丹心만은 못그리나 초상만은 永傳하네

端莊(단장)하고 簡重(간중)하신 그 모습이 완연하니

엄숙하게 받들어서 천년만년 전하리라

畵工 불러 본을 뜨고 眞像에서 모사하다.

 

 

四仙亭(사선정)

<原文>

亭上奇觀似晝成 황疑凡骨入三淸 雙雙白鳥和烟靜 六六奇峯照水明

甲乙難尋碑篆跡 宮商己變棹歌聲 惟餘石面丹靑在 誰解仙郞萬古情

 

<역문해설> 글쓴이   韓尙敬(한상경)

이 정자에 奇한 절경 한 폭의 그림 이루었으니

속세의 범골이 삼청궁에 왔는가 궁금하구나

쌍쌍이 나는 백조 연무 속에 고요하다

육시육 기한 봉이 수면에 빚어 아름답구나

갑을의 년대는 비석에 문전의 흔적 찾을 길 없고

고전의 우아한 풍락 사공의 노 젓는 노래로 변했다

오직 호화한 석면에 단청의 흔적만 남았으니

仙郞의 萬古風情 그 누가 풀 수 있으랴

 

 

 題高城三日浦(제고성삼일포)

 

<原文>

一區勝景畵難成點點奇峯照水淸六字丹書(石面畵永郞徒南石行)雖剝落四仙遊跡尙分明華亭想見絃歌會精舍猶聞梵唄聲況在蓬壺毛骨송世間何事更關情

 

<역문해설> 

이 일대의 좋은 경치 그려 내기 어려워라

물에 비친 저 봉우리 그림자가 아름다워

돌에 새긴 여섯 글자 알아 보기 희미하나

四仙들이 놀던 자취 아직까지 분명하구나

亭上에는 풍악소리 노는 모습 보이는 듯

절간에는 염불 소리 낭랑하게 들리는 듯 하여라

蓬萊方丈(봉래방장) 왔던 내가 毛骨이 송연하구나

세상사를 알 수 없네 이런 풍정 또 있는가.

 

 

送忠淸道都觀察使 韓尙敬 詩 序(송 충청도 도관찰사 한상경 시서)

 

 

<역문해설> 글쓴이 양촌 권근

  홍무 병자년(서기 1396) 여름에

  簽書中樞院事 韓公(첨서중추원사 한공)이

  충청도 관찰사로 특임되어 장차 부임할 때

  나에게 격려의 말씀을 청하니

  이것은 귀머거리에게 말을 들으라는 것과

  봉사에게 길을 물음과 같은 격이다.

  그러나 도의로 사귄 친구요 또 誼(의)로 생각한들

  어이 한 말씀 없을 수도 없는 처지라 그래서 스스럼없이

  愚論(우론)을 가지고 고한다.

  대저 백성의 병이 세 종류가 있으되 그 병을 다스리는 법이 각기

  다르니 養生(양생)의 잘못으로 생긴 병은 돌침으로 다스려야 하고

  타고난 품성이 中正을 잃은데서 생긴 병은 학문으로 다스려야 하고

  政令(정령)의 실수는 天再(천재)로서 학문의 正道를 얻은 자가 아니면

고칠 수가 없는 것이니 이 세가지가 모두 급한 당무이지만 둘째까지는 그 일개인의 이해 관계뿐이고

셋째번 것은 일국의 정치에도 관련되는 것이어서 輕重과 緩急을 뚜렷이 알 수 있는 것이다.

庸劣(용렬)한 의원은 그 병을 다스릴 수 없고 천박한 학자로써는 그 운기를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그만한 재질이 있더라도 그 만한 학식이 없으면 시술이 능히 적중치 못할 것이니

가령 진료하는데 진맥도 제대로 못하고, 조제하는데 약방문도 제대로 못하며 심지어 寒症(한증)에

냉약을 더하고 온증에 열제를 더하는 따위가 크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고려 왕씨가 쇠망하던 시대에

빈약하고 천박하였던 정치로 백성에게 끼친 병폐가 극심하더니

우리 전하께서 여러모로 治民을 시도할 때 논리와 綱常(강상)을 세우고

시비와 선악을 바로 잡았으므로 민폐가 십중팔구 없게 되었다.

급기야 즉위하여 仁으로 정치를 시작하니 백성의 疾苦(질고; 병과 고통)가 완연이 풀어져

통증이 없어져 부종이 치료되었으며, 쓰라린 자가 일어나고 많은 자가 살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시정이 광범위하게 보급되지 못하고

濟民(제민)이 대중에게 미흡함을 염려하여 선량한 관리를 채용하여 치민하고

대신을 파견하여 감찰케하고 아무리 피촌과 원격한 지방의

단 한 사람도 안정된 제자리를 못가진 사람이 없게 하였으니 지극한 인애와 극진한 의리로다.

 

오직 공은 천성이 자상하고 학문이 正大하여 그 操行이 단정하고 恪謹(각근; 삼가며 조심)하며

그 처사가 정밀하고 민활하여 典章奏(전장주; 上書)를 관장하여 출납이 공정하였고

의정의 樞密機要(추밀기요)를 관장할 때는 裁決(재결)이 타당하였으니

인격과 학식을 겸비하였었다. 그러므로 우리 전하께서 주위의 여러 신하 중에서 특선하여

이런 하명을 내리신 것이니 나의 눈이 되고 귀가되어 시청을 넓히사

만백성의 병폐를 통찰하자는 뜻 외는 다른 뜻이 없는 것이다.

아,, 장하도다.

백성의 이해가 바로 나라의 治亂에 관련되는 것이므로

이것을 공에게 부탁하여 다스리게 하였으니 어찌 존경치 않을 수 있는가

가히 존경할 만한 일이 아닌가

경전에 이르기를 백성을 갓난아기 보호하듯 하라 하였으니

정성들여 노력한다면 비록 적중은 안되더라도 성공이 멀지 않을 것이다.

진실로 성심을 다하여 근면하고 허심탄회하게 처사하여

추위에 떠는 자를 따뜻이 해주고 목마른 자를 축여주며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자가 희열을 구가토록 해주고 병으로 쓰러지는 자를 회춘장생토록 해야

위로는 국가의 지상명령을 다한 것이요

아래로는 학문의 진의를 관철하였다 할 수 있으리라

저 공문서나 전곡의 출납 같은 것은 각기 법규가 있을 것이니 무슨 군소리 할 필요가 있겠는가.

 

 

精敏天資美 정교하고 민활한 심성이 깨끗하고 아름다워

忠淸世德傳 충청도의 명문대가에 전해 오는 세덕일세

戴商功夙著 어진 임금 추대한 공명이 높아

分峽化初宣 두메 산골 벽촌에도 어진 정치 베풀었네

治道將升泰 뻗어가는 선정 길에 태평연월 다가오니

風謠定人編 우리 님의 성덕 기린 송덕가도 드높아라

會看棠樹葉 周召公(주소공)의 仁政을 기려 사랑 받던 저 당나무 잎은

蔽비暎春烟 지금도 우거져 봄 안개가 서리었네

 

 

題雜詠後集(제잡영후집) 글쓴이 양촌 권근  

<原文>

先生柳巷韓公詩律最淸峻大爲韓山牧隱公所稱賞今其嗣信齋先生奉使關東錄一帙愚嘗得而觀之淸新沖澹眞能得其家法矣愚旣跋其後而歸之今又得觀此錄圭復不己益歎其妙其詠雄雉云一心何耿介五彩自鮮明者眞善於自道者矣後之觀者거不謂吾言爲信  (東文選)

 

<역문해설> 

  선생 류항 한공의 시율이 뛰어나게 청아하고 고상하여 목은 한산이공이 대단히 칭찬하더니

지금의 그 長子 신재선생이 관동지방 관찰사로 봉직할 때 한질을 수록하였다.

일찍이 내가 읽어 본 즉 청신하고 담백한 맛이 진실로 그 가통을 잘 체득하였다.

내가 그 책 말미에 발문을 쓰고 왔더니 지금 또 이 초록을 보고 재삼 되풀이하며 읽어도

싫지 않고 점점 그 묘미를 찬탄하게 된다.

그 웅치를 제하에 읊었으되

 

한 마음이 어이 그리 진실한가.

오색의 영롱한 빛이 스스로 선명하도다.

 

이 오언시 一句(일구; 한귀절)는 참으로 자기를 말한 뜻이 잘 표현되었다.

후일에 이 글을 보는 이가 어찌 내 말을 믿지 않겠는가.    -東文選(동문선)-

 

 

題江原雜詠前集(제강원잡영전집)

<原文>

右江原雜詠都觀察使淸城韓公之所著也公以門閥之胄詩禮之學早際風雲蔚爲開國元勳出入中外卓有聲績稟氣之剛明處事之精詳爲世所服至其發於題詠者則典實而無華淸峻而不野發乎性情止乎禮義忠君慰親憂國愛民之心애然溢於賦興之中古人云登高能賦可以爲大夫公之謂矣

     永樂六年丙戌夏四月旣望  東文選

 

<역문해설> 

  이 강원잡영은 도관찰사 청성군 한공의 저술이다.

공은 명문의 후예로 시와 예에 胄(주; 투구)를 이뤄

조년에 풍운이 거센 변동기를 당하여 장중하게도 개국원훈이 되시고

내외직을 역임하면서 탁월하게 성적을 거양하였으며 천품이 강직하고 명통하여

모든 처사가 정밀하고 자상하니 세인이 모두 감복하였다.

그 쓰고 읊은 詩賦(시부)에 발로되는 정취에 법식이 신실하고 꾸밈이 없으며

청아하고 고상하여 속된 데가 없고 본성에서 발현되어 예의에 위배된 데가 없으니

군주에게 충성하고 부모를 연모함과 국정을 우려하고 만민을 애무하는 심정이

은은히 賦(부)와 興(흥)에서 넘쳐 흐르는지라 옛 사람이 이르되

높은 곳에 올라서 능히 賦(부)를 지을 수 있어야 大夫가 될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공을 두고 한 말이로다.

     영락 6년 병술 여름 4월 16일  (동문선에서)

 

 

國朝名臣言行碌(국조명신 언행록)

 

 

<역문해설> 

  문간공의 字는 叔敬(숙경)이요

  號는 信齋(신재)이다.

  본관운 청주요, 지정경자(서기 1360년)년 생이다

  고려때 司膳署令(사선서령)의 벼슬에 있었다

  우왕 8년(1382)의 임술에 과거에 합격하여

  禮儀佐郞 藝文應敎(예의좌랑 예문응교)에 배명되었다.

  임신년(1392) 조선 태조가 창업 하자

  개국공신에 참여 되었고,

中樞院事 都評議使司事(중추원사 도평의사사사)에 제수되고 이어서 충청, 경기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西院君(서원군)에 봉작되었고 태종조에 參知議政府事(참지의정부사)의 배직을 받고

豊海江原 觀察使(풍해강원 관찰사)에 출사하였으며 또 중앙에 들어와 이조판서를 지냈다.

을미년(서기 1415년)에 宰相(재상)에 임명되었고 府院君(부원군)에 진봉되었으며

관직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세종 계묘년에 향년 64세로 생을 마쳤다.

태종이 즉위하여 상경에게 말했다.

『 내가 왕업을 이어 받아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지 모르겠소, 실로 난감하기만 하네 』

상경이 대답하기를

『 古人들께서 말씀하시기를, 왕업을 이어받아 그 이정의 왕업을 그대로 법 받기는 어렵다고

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를 알고 계시니 실로 우리 동방국의 복 된 일입니다. 그러나 알기가

어려운게 아니라 실행하기가 어려움을 아셔야 합니다.』하니 임금이 이를 가상히 받아 들였다.

欽借兵部主事 端木智(흠차병부주사 단목지)가 조선에 왔었다.

이때 공은 接伴使(접반사)로서 수순을 예의로 접대하였다 이에 단목지가 말했다.

『 晏平仲(안평중)은 사람들과 교재를 잘하며 친구와 오래 사귀어도 상대방을 공경했다 했는데

공은 바로 안평중과 같은 사람이다.

 

당시에 얘기가 있었는데,

고려 종실의 한 사람 중에 王麻(왕마)라는 孼子(얼자; 서자)가 민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 게 되어

知申事 金汝知(지신사 김여지)가 政府, 형조, 대간으로 하여금 그를 다스리게 하니

이에 대해 임금이 말했다.

『조선 개국 초에 고려 종실이 보전될 수 없었던 것은 태조의 본뜻이 아니었고

한두명 대신의 실책이었다. 나는 고려 종실의 후손을 보전할 뜻을 이미 굳혔노라 』하셨다.

이에 玉川君 劉敞(옥천군 유창)이 말했다.

『전하께서 지금 하신 말씀은 진실로 우리 종사에 만대의 복이 될 것입니다.』

이어 이조판서 한상경이 말했다.

『국초에 제사 지시사가 되었을 때 고려 종실에 대한 사실을 들었습니다.

고려 종실이 보전되지 못한 것은 태조께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日月錄)』

 

三功臣(삼공신)이 왕에게 헌수하였는데, 상경이 헌수하자 태종이 말했다.

『내가 왕위에 처음 즉위하였을 때 경이 나에게 왕다운 왕이 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아는 것이 어려운게 아니라 실행하는 것이 어렵다는 걸 아셔야 한다고 해서 나는 지금도

경의 그말을 잊지 않고 있다네 』

『왕께서 이지 않으셨다고 하니 다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누구나 어떤 일이던 시작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유종의 미를 거둔 사람은 드뭅니다 』

왕께서는 또한 좋은 말이라고 칭찬하였다.

 

왕이 상왕께 헌수할 때 孝寧大君 補(효령대군 보), 領敦寧 柳廷顯(령돈녕 유정현),

領議政 韓尙敬(영의정 한상경), 右議政 李原(우의정 이원)과

그외 많은 宗親(종친), 駙馬(부마), 六代言(육대언)이 뫼시고 연회를 치루었다.

주상이 무릎을 꿇고 식탁에 나아가 상왕에게 헌수하고 말했다.

『내가 왕위에 즉위함을 회피했던 것은 상와을 복되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상왕께서는 왕위를 물러나 더욱 존중 받게 되었습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게 되자 신하들은 춤을 추었는데 상왕은 말했다.

『지금 주상을 부탁할 사람을 만나지 못했으니 내 비록 근심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주상니 진실로 文(문)을 지킨다면, 나라의 태평을 이룩할 인주가 될것이리라.』

한상경등이 말했다.

『진실로 聖上(성상)께서는 아들도 알아주시고 신하도 알아주시는 총명함으로 인하여

臣民(신민; 신하와 백성들)은 장수하시기를 빌고 길이 태평을 누릴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즐거움이 절정에 달하여 파하니라.

 

공은 소시적부터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학식이 있고, 도량이 넓었으며 처신하는데는 단정하고 공손했다.

장성하여 벼슬 길에 오르자 청렴을 자신의 지조로 삼았으며 집에 있을 때는 검소하여

의복과 음식이 정결함을 취할 뿐이었다.

어머니를 섬김에 아침 저녁으로 보살폈으며, 몸소 좋은 음식은 먼저 맛보고 드렸다.

비록 관직이 높거나 늙었어도 한번도 이렇게 보살펴 드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부모상과 또 3년상을 다 치르고 나서는 공의 병이 위독해지자

『내게도 병이 있은지 오래 되었다.

그러나 부모님보다 먼저 죽어 연로하신 부모님의 마음을 슬프게 해 드릴까 걱정하였는데

지금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 마쳤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공은 문벌 있는 집안의 후손으로서

시와 예에 대한 학문에 전념하여 일찍이 높은 지위의 벼슬에 앉게 되었으며

훌륭한 개국원훈이 되었으며,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여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본래 타고난 기품이 강직하고 현명하여 일을 처리하는데 정밀하고 자세하여

세인의 추모를 받았다.

심지어 題詠(제영; 詩)를 읊는데는 진실하여 꾸밈이 없었으며 탁 트이고 씩씩하되

비속하지 않으며 진실한 심정에서 읊되 예의에 그쳤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버이를 그리워 했으며,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애연히 시를 읊는 흥취 중에 넉넉히 드러났다.

 

 

賜祭文(사제문)

 

 

<역문해설> 

  癸卯 三月十六日 丁酉(계묘 3월 16일 정유)

  왕이 이르기를 어진 신하의 개국의 공훈은

  고금을 막론하고 막중하고 임금의 報功之典(보공지전)은

  어찌 살아 있을 때나 죽은 뒤가 다르겠는가

  경은 性行이 端方하고 識慮가 정달하다

  儒雅는 世濟하고 淸勤은 그 가문에 전하네

  陰陽中正之氣를 춤하고 마음에는 만리가 잠겨 있어

  婦泰往來의 機를 살피다 前朝가 쇠약해지매 이때 聖祖가

  새나라의 경륜을 펴야 할 때라 생각하고 衆人들이

  추대에 힘을 합할 때 경도 이에 협찬하여 모의하야

  寶璽를 받들어 邸第에 바쳤다. 及膺圖록하여 비代咽喉하였다.

  列聖의 奬知를 遭逢하여 中外에 華聯을 踐歷하였다.

  4도 감사를 지내면서 黜陟이 밝았고 諸曹의 師長으로 있을 때는

  공을 베풀기에 힘썼다. 栢府의 風化를 振肅하고 殷鼎의 和羹을

  조제하였다. 帶礪의 산하와 가지런하고 竹帛에 공명을 드리우다

  슬프다. 내가 弔慰치 아니하면 할 바를 알 수 없도다. 원로의 詢諮에

  의지하여 構穫에 闕함이 없다. 경은 4조의 구감이요 暮年의 桑楡이다.

  모친상을 당해서는 효자라 세인이 칭찬하였고

  鯉庭左納言之過에 미쳐 족히 아들의 영광이다.

칠순도 채우지 못하고 나로 하요금 이토록 슬프게 하는가.

영령이 이미 갔으니 이에 베품이 마땅하도다.

기와의 勞를 이제 갚고 새 은총을 여기에 나타낸다.

아 戱라, 雲臺圖像忠賢(운대도상충현)이 凋落함을 늘 恨하고 周禮에 司勳喪制라 하였으니

終始에 더욱 근면하리라.

 

 

文簡祠庭碑(문간사정비)

 

조선조의 태조가 건국의 창업을 일으킬 때

웅략을 품은 영재들이 구름 같이 모여 대업에 협찬하였다.

이 창업시에 의정부 영의정으로 서원부원군에 봉작된 한상경이

시중 裵克廉(배극렴)과 함께 국인을 이끌고 보새를 받들어 태조의 사저에 찾아가

이를 바치고 천세를 불러 그 공으로 익대개국공신이 되었다.

그 후 태종이 등극하여 북방을 순행할 때 三功臣(삼공신)이 술을 올려 헌수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내가 즉위하였을 때 경이 나에게 앞으로의 할 일을 일러 주었는데

그 뒤 어려움을 알지 못하고 어려움을 실행하여 내가 지금도 그 일을 잊지 않고 있다 하니

공이 다시 고하기를 처음이 좋으나 끝도 좋아야 할 것이라 하니 또 칭찬하셨다.

64세로 세종 계묘년에 세상을 뜨니 왕이 슬퍼하고 신하를 보내 조위하고

3일간 정사를 폐하였으며, 장사를 관에서 보살펴 賻米 豆 칠십석을 하사하고

제문까지 내렸는데 그 제문에 良臣開國의 공훈이 고금에 막중하니 인주가 보공하는 의전의

존몰이 어찌 다르랴 경은 성행이 단정하고 식려가 정달하여 부태생래의 기미를 잘 살폈다.

성조가 개국 창업을 할 때는 보새를 사제에 바쳤으며, 이는 산하도 아는 일이요

역사에 공훈을 드리운 일이다.

아!. 운대도상의 충현이 조령을 한하고 주례에 사훈의 상제는 그 시종이 익근하다 라고 하였고

시호를 문간이라 사하였다.

영묘 갑신(서기 1764년)에 후손 應宇(응우)가 옛 화상이 그을리고 낡아

새로이 상을 모사하여 溟州 發翰(명주 발한) 서쪽에 사당을 지어 봉안하고 향화를 이어 오다가

계축년 가을에 종인들이 협의하여 그 서쪽에 구제에 따라 移建하고 묘정에 비석을 세워

후손 端愚(단우)가 나에게 비문을 지으라고 청한다.

아!. 공이 류항선생에게서 출생하고 목은의 문하에서 詩禮의 학업을 익혀

이태조 창업 때 공훈이 조정에서도 그 위계가 가장 높아 성예가 길이 빛나고 있는데

어찌 나 같은 사람이 함부로 蕪辭를 적을 수 있겠는가.

堂宇가 壯麗하고 빈조가 깨끗하여 후손들의 모선의 정이 절실하니

하물며 綱淪法역之日에 있어서랴. 이에 일은 필하였으나 모름지기 실행이 어렵고

유종의 미를 거두기 어렵다는 계훈을 잊어서는 아니 되고

조석으로 충효를 일깨워 덕을 닦으면 문간의 광휘는 더 할 것이다.

불초한 사람이 이 뜻을 힘을 다하여 받들고 사를 맺지 못하노라

     글쓴이 ; 唐城 洪鍾凡 謹撰 (당성 홍종범)

 

 

廟庭碑文(묘정비문)

 

서원부원군 한상경 선생의 시호는 문간이요,

관적은 청주로 문경공 한수 선생의 아들이시다.

선생은 고려조에 등과하여 사관하였으나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

국권을 지탱하지 못하게 되자 태조를 추대하고 보새를 봉헌하여

조선 개국에 주석의 위훈을 세워 익대개국공신이 되었다.

외직으로는 경기, 충청, 황해, 강원도의 관찰사를 지냈고

내직으로는 공조, 이조의 판서 대사헌, 우의정을 거쳐 마침내 병신년에 영의정에 올라

서원부원군에 봉작되셨다.

선생은 근학청렴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노년에 관직이 높아 졌어도 어머님 섬기기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경자년에 어머니의 상을 치루고 병이 깊어져 세종 5년 3월 7일에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부고에 접한 세종께서는 애도의 뜻으로 3일간 국사를 휴무케 하고

良臣開國(량신개국)의 공훈은 고금에 막중하고 인주보공의 전은 존몰이 어찌 다르리오

경은 평생 성행이 단정하고 識慮가 정달하였다는 제문을 내려

선생의 공적과 인품을 칭송하였다.

영조 갑신년(서기 1764년)에 후손 應宙(응주), 應宇(응우), 應正(응정)이 중심이 되어

동해시 사문동 양촌에 선생의 영당을 짓고 영정을 모셔 향화를 봉대하다가

계축년(1973년) 가을에 영당을 그 서쪽에 이건하고

후손 瑞愚典校(서우전교)가 묘정비문을 나에게 지으라 하나

류항의 문벌이요 목은의 학통인 선생의 행적에 함부로 붓을 드는 것이 오히려 누가 될까

두려워 여러번 거절하였으나 누차 간청을 뿌리치지 못하여 끝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蕪辭를 짓기에 이르렀다.

     서기 1984년 10월 3일    강원대학교수                 최영순    謹撰

                                        강원 해동서예원장         최하용   謹書

                                        문간공 묘정비중건추진위원일동 竪

 

 

廟庭碑文(신도비문)

推忠同德翊戴開國功臣大匡補國崇錄大夫 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 藝文春秋館書雲觀事 世子師 西原府院君 贈諡文簡韓公(諱 尙敬)

 

 

<역문해설> 

(추충동덕익대개국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예문춘추관서운관사 세자사 서원부원군 증시 문간 휘 상경)

태조가 龍興(용흥)할 즈음에 이름 있는 公卿(공경)들의 덕망으로 일컫는 자가 많았다.

여기에 산악의 기운을 타고 鐘鼎(종정)의 도량을 받아서

王祥과 姜詩의 행실로 希文과 君實의 名望을 온 몸에 모아서

朝野가 加額하고 죽어서는 환海가 아파하고 아쉬워하며 비록 婦儒(부유)와 輿擡까지도

한결 같이 일컬었다.

공의 지난날 일과 풍미하던 당시의 일을 우러러 사모하고

백성들을 윤택케 하였음을 탄송하지 않을 수 없다.

슬프다, 장함이여.

공의 휘는 상경이요 자는 숙경이며 호는 신재요 성은 한씨인데 본은 청주다.

시조 휘 란은 고려 태조를 도와

統合三韓壁上功臣 三重大匡 門下太尉(통합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문하태위)에 오르시고

청주에 사신 까닭에 본관을 청주로 하였다.

 

7세에 이르러 휘 康(강)이 고려 고종 무자년에 나셔 계묘년에 國子監試(국자감시) 장원에 오르시어

匡靖大夫 都僉議中贊 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判典理司事 世子師 (광정대부 도첨의중찬 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판전리사사 세자사)에 이르러 치사하시고

계묘년 2월 22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76이요 시는 文惠(문혜)이고,

고종과 충렬왕 두 임금을 섬기고 相業을 이어 왔음을 역사가 전하고 있으니 공의 5대조가 되신다.

 

고조 휘 謝奇(사기)는 문과에 급제하시어

朝靖大夫 僉議府左司議大夫 寶文閣提學知制誥(조정대부 첨의부좌사의대부 보문각제학지제고)에

이르고 翰林直學士 亞重大夫 輕車都尉高陽縣侯(한림직학사 아중대부 경거도위고양현후)를

증직 받으시고

 

증조 휘 渥(악)은 문과에 급제하시어

宣力佐理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都僉議右政丞 判典理司事 上黨府院君

(선력좌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도첨의우정승 판전리사사 상당부원군)에 이르시고

시는 사숙이다. 충혜왕의 廟庭(묘정)에 배식되시고 성품은 근신하고 기국이 있다고 전한다.

 

조부이신 휘 公義(공의)는 字가 宜之(의지)요 정미년에 나시고

三重大匡 戶部尙書 淸城君(삼중대광 호부상서 청성군)에 이르시고

을미년 10월에 돌아 가시니 壽가 59세요. 시는 平簡(편간)이고 성품이 자상 근검하시며

예법에 어긋남이 없고 충정왕이 遜位(손위; 왕위를 물려줌) 하던 날 백마산 아래서

먹을 것을 주청하여 충성을 이루시고

 

부친 휘 脩(수)는 자가 맹운이요 호는 류항으로 충혜왕 계유년에 나셔서 정혜년에 문과에 오르시니

輸忠贊化功臣 匡靖大夫 判厚德府事 右文館大提學 淸城君(수충찬화공신 광정대부 판후덕부사 우문관대제학 청성군)에 이르시고 갑자년 3월 28일에 돌아가시니 壽는 52이시다.

시는 문경이고 15세에 등과하여 세임금을 섬기시고 학문과 행의가 세상의 망중을 받으시고

문집이 있고 金石에 글씨를 많이 전하셔서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문장은 班固(반고)나 司馬(사마)와 같고 필법은 鍾유(종유)와 王羲之(왕희지)를

쫓을 수 있다고 하였음을 역사가 전하고 목은 이색선생과 도의로써 사귐이 깊었다.

配는 靜寧宅主 安東權氏 侍中 吉昌府院君 適(정녕택주 안동권씨 시중 길창부원군 적)의

따님으로 공민와 경자년에 공을 낳으셨다.

 

공의 인품과 풍모는 魁偉(괴위; 으뜸나고 훌륭함)하시고 沈毅醇謹(침의순근)하셔서

희희를 좋아하지 않으셨다.

8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刺口難疑(자구난의)하여 어린애가 아니라 어엿한 어른과 같았다.

일찌기 목은선생 문하에서 의리를 배우고 덕을 닦고 행실이 높았다.

항상 말하기를 장부는 마땅히 성현으로써 기약하여 일언 일행동도 승척에 어긋남이 없고

정훈에 힘 써 나가야 한다고 하셨다.

임술년 문과에서 3인에 뽑혀 예의정랑이 되시고 우정언에 옮겨

典理正郞 藝文應敎 工部摠郞 宗簿令(전리정랑 예문응교 공부총랑 종부령)을 역임하고

갑자년에 부친상을 당하시니 공의 나이 25세였다.

哀毁(애훼) 하시고 古禮(고례)를 심히 고집하시고 게을리 아니하시니 감탄 않는 이가 없었다.

임신년에 密直司 右副大言學(밀직사 우부대언)에 이르시고

이조가 개국할 때 추대하는 일에 참여하여 보새를 드려 익대개국공신이 되셨다.

중추원 도승지에 옮겨

推忠翼戴開國功臣 僉書中樞院事 都評議使事(추충익대개국공신 첨서중추원사 도평의사사)에

오르시고, 외임으로는 忠淸道 都觀察使 封 西院君(충청도 도관찰사 봉 서원군)과

京畿左道 都觀察使(경기좌도 도관찰사)가 되시다.

건문 2년 태종이 즉위하여 공에게 이르기를

『내가 丕緖(비서;왕위를 이어 받음)을 이었으나 할 바를 알 수 없으니 실로 어렵구나.』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后克艱闕后(후극간궐후)라 하였는데

전하께서는 그 어려움을 아시니 실로 동방(우리나라)의 복됨입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을 아는데 있는게 아니라 그 어려움을 행하는 것이 어렵사옵니다.

태종이 쾌히 받아 들이고 參知議政府事(참지의정부사)를 제수하고

칙사로 온 兵部主事 端木智(병부주사 단목지)를 맞이하는 접반사가 되어 수순을

예로써 대접하는데 게으르지 않으니 단목지가 말하기를

안평중이 사람을 사귐에 오래 공경한다 했는데 공이 그런 사람이라 하였다.

또 풍해(황해도), 강원 양도의 도관찰사가 되셨다가 내직으로 들어와

공조판서가 되시고 參知議政府事兼 司憲府大司憲(참지의정부사겸 사헌부대사헌)에 옮기셨다.

태종이 북방을 순행할 때 공을 보내 기거를 흠문하고 호조판서가 되셨다가

三功臣(삼공신)이 헌수하실 때 공이 술잔을 드리니 태종이 말하기를

내가 즉위할 때 경이 后克艱闕后(후극간궐후)라 하였는데 아직 잊지 않았노라고 하니

공이 주상께서 아직 기억하고 계신다니 청컨데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처음 시작은 잘 하는데 끝을 좋게 마치기는 힘듭니다 하니 또 옳다고 칭찬하셨다.

參贊議政府事 吏曹判書(참찬의정부사 이조판서)를 거쳐 을미년에

西原府院君(서원부원군)에 오르시고 議政府右議政(의정부우의정)이 되시다.

병신년에 영의정이 되셨다.

 

공이 사헌부대사헌으로 태종 6년 윤6월에 시무 열까지를 올리니

 

첫째, 鰥寡孤獨(환과고독)을 文王이 정사하는데 먼저라 이제 당하여 어찌 고하는 자가 없어

가야할 길을 읽고 있는 자 없겠습니까. 원컨데 한성부와 각 도 관찰사로 하여금

찾아내어 돌보게 하고 그 이름을 올리게 하며,

 

둘째, 맹자께서 이르기를 사람이 어버이를 어버이로 여기고 어른을 어른으로 여기면

온 나라가 편안하리라 하였으니 원컨데 나라 안의 효자순손과 의부절부를 찾아 포상하면

풍속이 순화될 것이며,

 

셋째, 五部學校(오부학교)에 교수와 훈도를 두고 관에서 생도를 모아 매일 가르치는데

점심도 없고 또한 사령이 없으니 각각의 주군 학교에 전답과 노비를 줄 것이며,

 

넷째, 죄 지은 자들 중 절도한 자를 풀어줄 때는 친척이나 같은 마을에 부탁하여

장물을 찾아내는데 곧 감추고 도망한다면 부탁 받은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 구류를 살리고

그 장물을 찾아내는데 이러면 풀어주는 은혜가 오히려 무고한 사람에게 해를 끼칠 것이다.

원컨데 지금부터는 절도한 자는 태장(곤장)을 쳐서 그냥 내보내지 말고

장물을 찾을 때까지 옥에 가두었다가 찾았을 때 풀어주도록 할 것이며,

 

다섯째, 무릇 성내에 역사(노역)가 있을 때 한성부가 五郞坊里(오랑방리) 사람으로 하게 하나

왠만한 사람들은 다 규면되고 실제로 역사하는 자는

다 무고한 집의 부녀자나 아동들밖에 없으니 전하가 백성을 긍휼히 여김의 뜻을 잃게 되니

원컨데 이제부터는 길 옆에 사는 자는 길 앞 청소를 제외하고는 다 금지케 하시고

 

여섯째, 무식한 무리들이 농사철에 사냥을 한다고 하여 곡식에 큰 피해를 끼쳐 무고한 백성의

원성이 하늘에 미치니 원컨데 이제부터 경기지방과 외방까지

농사철에 사냥하는 자의 출입을 금하고,

 

일곱째, 매를 진상하는데 사사로이 매를 가진 자들이 내왕하여 폐단이 많으므로

都巡問使(도순문사)에게 진상할 수를 정하고 都兵馬使(도병마사)는 진상을 받지 못하게 하고

기타 진상을 도순문사 외에는 다 금지시키고, 여러 고을의 수령 및 단련사들이

사사로이 매를 많이 길러 민폐를 많이 끼치니 아울러 이것도 금함이 마땅하며,

 

여덟째, 외방의 수령들이 부역하는 일에 예전의 규칙을 빙자하여 아전들에게 령을 내리고

논밭을 답사하여 군자금의 납세등을 감독하여 정하는데 몸소 하지 않으니

간사한 향리나 이방등이 무고한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예가 많으니

감사는 자세히 고찰하여 몸소 친히 않는 자와 납세의 업무를 규명하여

모름지기 납부한 수량이 남으면 비록 한 말이라 할지라도 다 돌려주게 할 것이며,

 

아홉째, 州郡 各里坊 別監이 이 관문을 진퇴하는데 다음에 응하여 와서

또 마을의 일이 혹시 지연되면 편달을 받게 되어 그 폐단이 막심하여 사람들이 다 피하여

무고자에 그 책임을 물어 5,6년 혹은 10년이 지나도록 바꾸지 않아

이 때문에 가산을 탕진하고 유리되어 떠도는 자가 있으니 수령들은 한 마을 사람으로 하여금

집집마다 한번씩 서로 바꾸게 하고 월말마다 그 명단을 기록하여 감사에게 보고하게 함을

법으로 정하게 하고,

 

열번째, 州郡의 창고에서 부과하는 논밭에 대한 세금 부과가 부족함을 채우기 위함이거나

묵은 땅과 경작 할 수 있는 땅을 가려 갈고 씨뿌림에 폐단이 없게 하여

부족 분을 보태는데 고을 수령이 정함에 둔전을 과하게 많이 두어 백성이 그 폐단으로

망하는 자가 생기니 각 고을의 둔전은 마땅히 그 수를 정하여 과하지 않게 하여

이를 어기는 자는 엄히 죄를 논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공은 태종 18년 무술 6월에 치사하시고 글 읽는 일을 생활화 하여

남의 시비를 입에 담지 않고 항상 조심성으로 선훈을 지키셨다.

어릴 때부터 눈에 지나고, 귀에 스치는 것을 하나도 잊어 본 적이 없어 사람들이

총혜함이 뛰어 났다고 곱게 칭찬하였다.

白軒 李景奭(백헌 이경석) 相國이 진심으로 칭찬하기를

하늘이 聖作을 열고 손으로 日穀을 붙들었도다.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제도하는데 편안히 다스리고 도가 높고 덕이 깃들어 있다.

시례학업에 또한 그 근원이 있으니 류항의 아들이요 목은의 제자이다

모든 일을 처리함에 어짐이 흡족하고 의로움이 두텁다고 하였고,

양촌 권근선생의 신재기에서는 공이 스스로 힘써 그 근본을 아는 바이다

그 處事精詳(처사정상)과 動作合議(동작합의)에 마땅히 하여 이를 나라 사람들에게 보이고

君上에게까지 알리었도다. 무릇 모든 일은 옛 일을 상고하여 일과 공을 베푸는데

남 다른 것은 이제 비록 천만년 후에도 탁연한 풍의를 여기서 느낄 수 있다고 하였다.

 

공은 평거에서도 위엄이 가히 범할 수 없으나 사람을 대하는데는 유연하셔서

그 도량을 측량할 수 없었고 효도 지극하셨다.

매양 탕약을 올리심에 밤이 깊도록 服勤不寐(복근불매; 잠자리에 들지 않고 기다림)하셔서

부인이 민망하게 여겨 그치게 하셨다.

공이 원래 풍질을 앓으시던 중 어머님께서 돌아가시매 공의 나이 61세이시다.

슬픔이 깊어도 옛 예법을 고집하셔 不懈(불해;게으르지 않다)하시니 병이 더욱 위중하게 되어

임금이 걱정하셔 대언을 보내 음식을 권하고 내의원를 보내 치료케 하고 문사가 끊이지 않았다.

세종 5년 계묘 3월 초7일에 돌아 가시니 임금이 들으시고 震悼(진도)하여

中使를 보내 조위하고 3일간 정사를 폐하고 관에서 장사를 치루도록 명하고

부의는 완산부원군 이천우의 예에 의해 米豆를 함께 70석과

종이 150권을 내리고 시를 문간이라 증하니

부지런히 배우고 묻기를 좋아하는 뜻으로 文이요,

한결 같이 덕을 게을리 하지 아니함을 簡이라 하였다.

 

공은 벼슬에 나가 청렴하고 銓選(전선)을 오래 맏아 오로지 공적이고 사사로움이 없었다.

집에서는 검소하여 음식이 깨끗한 것으로 취할 뿐이요 어버이를 섬김에 조석으로 살펴 드리고

음식 드리는 것에도 손수 맛을 보신 후에 올렸으며

벼슬이 높아지고 나이가 드셔도 한 번도 부모님 공양을 폐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스스로 호를 신재라 하시고 항상 거처하는 방에 信齋(신재)라는 현판을 걸어 놓고

仁義禮智信의 5덕을 힘 쓰셨다.

어머님의 장사를 치른 후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오랜 병이 있어 먼저 죽어 어버이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걱정하였는데

이제 자식의 도리를 다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셨다.

왕께서 예관을 보내 공에게 제사문을 내리고 그 글에 쓰기를

개국의 공은 고금을 막론하고 막중하거늘 임금으로써 그 공을 보답하는데

살아 있을 때와 죽은 후가 무엇이 다르리요 경은 성행이 단아하 방정하고

생각이 깨끗하고 통달하여 유아함은 세상의 제도함을 를 알았고

청렴하고 근면함은 가통을 전함에 충분하였다

몸으로는 사철의 한서를 갖추어 음양중정의 기운을 받고

마음으론 만리를 알아서 否泰往來의 기틀을 살피고 먼저 시대의 성쇠를 생각하였다.

이것이 聖祖(이태조)가 건국할 때 여러사람이 추대하는데 경이 협찬하여

옥새를 사저에 바치고 도록에 응하고 인후와 열서의 권장함으로

中外의 華職을 거쳐 4도감사로 명암을 분명히하고 諸曹의 책임을 맡아 공을 세우는데 힘쓰고

柏府의 風紀를 엄숙하게 떨치고 殷鼎의 和羹을 고르게 맛을 내고

帶勵의 산하와 같이 공명이 竹帛에 드리웠다.

슬프다 내가 弔喪을 못하여 어찌할까

오직 경은 4조의 귀감으로 모경의 상유를 누리게 되었다.

훤실에 모부인의 상을 당하게 됨에 다 효친의 도리와 鯉庭左納言之過를 일컬음은

족히 아들을 둔 영화가 되려니와 어찌하여 칠순도 채우지 못하고 과인에게 슬프을 주는가

영령이 이미 떠남을 슬퍼하여 휼전의 사반으로 지나간 수고를 보답하여 새로운 우악함을

보겠노라. 아름답다, 운대의 도상이여, 충현이 매양 조령됨이 한이로다.

주례의 사훈으로 상제를 시종하여 끝까지 보살피겠노라 하셨다.

 

여기서 가히 공이 나라를 위한 名相(명상: 명재상)임을 알 수 있으니 위대하다.

묘는 양주군 진접면 금굴리에 남향으로 있고

부인 마한국대부인 해주오씨는 판도판서 준량의 딸로 공과 상하 분묘이다.

1남 1녀를 낳으시니

子 惠(혜)와 女는 전의 이사관에게 출가하셔서 1남 1녀를 낳아다.

 

子 惠(혜)는 갑오년에 생원이 되고 정유년에 문과에 올라

가정대부 함길도 관찰사로 청산군에 책봉되고 신해년 3월 3일에 卒하다.

증 영의정 서원부원군을 증하고 묘는 금굴리 寅坐에 있다.

마음이 착하고 어질며 성품은 너그러웠다. 태종과 세종 두 임금을 섬기고 2도를 역임하였다.

配 정경부인 성주이씨는 동지총제 수의 딸이시다.

묘는 積城이었느데 실호되어 공의 묘 옆에 설단하였다.

後配는 정경부인 창녕성씨인데 판중추 시양혜 달생의 딸로 4남 1녀를 낳으시다.

장손 繼胤(계윤)은 通訓大夫 川寧縣監(통훈대부 천녕현감)이요

嘉善大夫 檢校參判兼 經筵參贊官 司憲府掌令(가선대부 검교참판겸 경영참찬관 사헌부장령)을

累還하시고

증손 峻(준)은 通訓大夫 形曹正郞(통훈대부 형조정랑)이요, 우(山+우)는 通仕郞이며

玄孫 승건(承乾)은 禦侮將軍 行忠佐衛大護軍(어모장군 행충좌위대호군)이요,

승곤(承坤)은 嘉善大夫 行承文院參校(가선대부 행승문원참교)이다

次孫 계미(繼美)는 推忠佐翼精忠 敵愾純誠 明亮經濟佐理功臣 輔國崇祿大夫 西原府院君

吏曹判書 五衛都摠府都摠管 贈諡文襄(추충좌익정충 적개순성 명량경제좌리공신 보국숭록대부

서원부원군 이조판서 오위도총부 도총관 증시문양)이요,

曾孫 아(山+我)는 純誠佐理功臣 資憲大夫 西陽君 諡恭悼(순성좌리공신 자헌대부 서양군 시공도)